문학의 곤경

소설의 향기

택선고집 2008. 7. 21. 11:08

소설의 향기

 

 

오양진

 

 

저출산은 요즈음 우리 사회의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출산과 육아를 뒷받침하는 사회 제도의 미비가 원인이라고 믿는데, 이러한 믿음의 확산에는 특히 자유주의 이념의 첨병인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의 헌신적인 기여가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몸소 저출산을 실천하며, 정치인들과 행정 관료들에게 조속한 대책의 제도화를 지속적으로 주문해왔다. 유치원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어린이 보육 기관이 자치 단체 관내에는 물론 학교와 학원, 교회와 병원, 그리고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에까지 들어앉게 된 이유이다.

 

모든 사회적 제도를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라고 규탄해온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저출산 방지를 위한 제도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던 것도 이상하지만, 민주화 이후 고조된 자유주의적 분위기 때문인지 정부 시책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최근에 자녀수를 늘리고 있는 것은 더 야릇하다.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호도하는 경우가 허다한 각종 매체의 통계적 리서치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들은 한 자녀 가정을 선택하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사람들은 두 자녀 가정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말 사람들이 정부의 제도적 시책에 부응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출산율의 증가는 사실 황금돼지 띠의 해라는 특수를 맞아 나타나게 된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의 한시적 해소에 작용한 사람들의 이기적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제의 지속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사회 제도의 미비는 저출산 원인의 필요조건일지는 모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인데, 실제로 출산율의 하락에는 사회 제도의 차원보다는 개인적 욕망의 차원이 더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 사람들은 출산과 그 이후에 올 육아 과정이 모든 이기주의를 포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이타주의의 고통을 부과하리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잘 안다. 그들은 그 이타주의 때문에 출산과 육아를 접촉과 관계에 대한 경이로운 체험이 아니라 욕망과 자유를 박탈당하는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임신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사람들에게 한 사회의 미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적 욕망에 대한 존중보다 더 높은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판단하고 교정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기준들에 대한 가정은 부당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 확신하는 듯한데, 놀랍게도 이러한 욕망의 수평화 속에서 실제로 모든 영역의 공적 권위들은 개인적 욕망의 발현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더 좋을 것도 더 나쁠 것도 없는 이기적 욕망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사회적 아노미는 총체적인 것이 되고, 여기서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일의 중요성은 완전히 유실되고 만다. 그러고 보면 부모의 권위가 우습게 되어버렸는데 아이 갖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평등주의의 기조가 유난스럽다고는 하지만, 여기 이곳만큼 모든 욕망의 상대주의가 철저하게 관철되는 곳은 없다. 특히 우리의 교육 현장은 자기 이외의 모든 외부적 권위를 거부하는 데서 생기는 소포클레스 식 비극의 주요한 공연장들 중 하나이다. 가령 지난 학기에 나는 한 대학에서 글쓰기 관련 교양강좌를 맡아 수강자들에게 첨삭지도를 해주었는데, 그들은 그 교정이 자신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억압한다고 생각했는지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또 다른 대학에서는 인문학 교양강좌를 세미나의 형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는데, 토론 과정에서 학생들은 교사의 설명을 단지 하나의 견해로 치부하는 경악할 만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인문학에 관한 진지한 토론은 시종 소란한 말다툼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 중 상당수가 자유주의적 파르티잔들이 칩거하고 있는 대안학교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 상황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진리의 보편적 권위를 욕망의 개인적 권위로 대체하면 오직 반대되는 것 간의 상대주의적 거리와 이에 수반되는 자유주의적 난맥상만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들이 소설의 아이러니를 말할 때 의미하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정영문의 창작집 『목신의 어떤 오후』(문학동네, 2008)는 그런 아이러니의 문제를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흥미로운 작가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아이러니를 독이 아닌 약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솔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브라운 부인」이라는 단편은 난데없이 어느 부부의 평온한 일상으로 총을 든 어린 강도들이 침입해 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강도와 인질이라는 분명하게 유지되어야 할 서로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만 기묘한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명백한 윤리적 경계는 철저히 파괴된다. 브라운 부인이 남편을 무척 기만적이고 옹졸한 사람으로 무시하는 데 비해 강도는 무척 외로운 사람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정말 무척이나 이상야릇하다. 김승옥의 「야행」이후, 반대물 간의 거리 감각이 그와 같이 비윤리적인 성격 속에서 발현된 경우는 달리 찾기 어렵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관한 작품이 아니라면, 의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영문의 소설은 예외 없이 아이러니의 상대주의적 감각을 억압하는 의미의 보편적 규범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다. 소설에서 일정한 의미와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의미들의 위계적 결속을 가능케 하는 동기와 요점이 필수적이지만, 그의 소설에서 비유컨대 요점은 독단을 강제하는 공안정권이고 동기는 의미의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그 정권의 주구들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브라운 부인이 강도의 범죄 동기를 끝내 알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미소 지었던 이유이고, 나아가 정영문의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아무런 요점도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만족하는 까닭이다. 의미의 카스트가 붕괴되는 지점에서 솟아나는 그런 정서적 쾌감은 그의 소설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어떤 선의의 공간과도 관계가 있는데, 또 다른 단편 「여행의 즐거움」에 나오는 두 남녀의 여러 대화들은 그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가령,

 

“매미 소리는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뭐가 노골적이라는 거야?”

“그냥, 뭔가가.” 그는 매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 그가 말했다.

 

여자의 막연한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남자의 공감적 태도 속에서 뚜렷한 것은 모든 말은 상대주의적 권리를 갖는다는 아이러니의 교의이다. 그래서 작가는 여기서도 무한한 가벼움의 느낌이라는 자유주의적 감정을 만끽하는 것인데, 그러나 선의와 공감의 원천으로 작용할 것으로 가정되는 그러한 상대주의적 교의는 스스로가 자신의 진리주장을 철회해야만 하는 이른바 오우로보로스 식 자기부정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아이러니의 감각이 순전하게 선의와 공감만을 자아낼 것이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기도 한데,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화해를 불러오기보다는 갈등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두의 주장이 동등한 자격을 갖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은 민주적인 관용과 공존의 윤리가 아니라 진화론적 경쟁과 생존 지침이고, 그리고 이것은 정영문의 소설에서 아이러니의 감각을 두둔하는 것이 아주 철저하게 경솔한 이유이다.

 

사실 소설가들은 아이러니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망상을 사회적으로 만연시키는 데 앞장서왔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아이러니를 의미와 가치의 위계에 따른 모든 종류의 억압과 강제를 막을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원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요사이 젊은 작가들은, 진리에 대한 불가지론에 기초하여 어떤 것도 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것도 옳지 않다는 어리석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가지고 소설적 아이러니를 멋지게 장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옳고 그른 것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간혹 방지할 수는 있겠지만, 대개는 지속적으로 옳은 것이 그른 것들 속에 묻혀 사라지는 몽매주의가 촉발될 것이다. 저마다의 욕망들과 저마다의 의견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될 때 자라나는 것은 무질서이지 자유가 아니다. 가령 어느 포장마차에서 벌어진 난장판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사아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임없이······”

한 사내가 술을 먹다가 노래를 시작한다. 그는 가난에 힘이 실리던 시절을 떠올리며 점점 비장해진다.

“아앞서서 나가니이 사안 자여 따르라!”

“벼엉신”

“요즘 귀신들은 뭘 먹고 사는지 몰라.” 한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넥타이 둘이다.

사내는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고 한 녀석에게 달려든다. “뭐라? 그래! 너 같은 새끼 잡아먹고 산다. 어쩔래? 넥타이 매고 건들거린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어?”

국물은 사방으로 튀고, 포장마차 안은 엉망이 된다.

“에이, 씨펄. 저런 새끼 땜에 운동권 애들이 싫다니까.”

또 다시 사내는 그쪽으로 몸을 날린다.

 

이 장면은 솔직히 김영현의 신작소설집 『라일락 향기』(실천문학사, 2008)에 나오는 것인데, 정확히 말해 「낯선 사내와 술 한 잔」이라는 단편의 한 대목을 약간의 탈맥락화를 통해 내가 발췌하고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는 처방전이 아니라 분명 병리학이 되어 있다. 그러나 정영문의 경우와는 달리, 김영현의 아이러니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항하는 소설적 방법이 아니라 사회적 무질서의 원인이 되는 현실 그 자체로 나타난다. 김영현 소설에서 아이러니는 세계관이 아니라 이른바 세계상으로 인식된다.

 

예를 들면 「여름에서 겨울 사이」라는 단편의 서두에는 퇴직 후 소설을 쓰겠다며 방을 얻으려는 주인공이 값이 저렴한 대로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 복덕방 영감과 흥정을 벌이는 대목이 나오는데, 염상섭 식 속셈의 차원에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이와 복덕방을 운영하는 이의 도덕적 차이는 거의 없다. 서로의 셈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교환의 제로섬 사회에서 현저한 것은 말하자면 윤리적 평형상태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내면적인 상황이기도 한데, 자신도 문학병을 앓았다며 주인공에게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는 오 원장은 사실 동네 애들이 들락거리는 것이 싫어 화장실에 자물쇠를 채워두는 사람이기도 하다. 확실히 문학의 시대는 갔고, 황금의 시대가 왔다.

 

김영현의 소설은 대체로 반대물 간의 거리 감각을 의미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자유의 방법이 아니라 가치의 평등주의에서 유래한 윤리적 무관심의 현실에 관련시키고 있다. 요점과 동기는 확실한데, 그의 소설들은 오늘의 현실을 자본이라는 물신이 욕망의 수평화를 통해 도덕적 기준이라는 중심을 해체하면서 생존을 위한 권력 의지만이 창궐하는 이른바 니체 식 선악의 피안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결국 가치추구가 개입된 사고가 단절되는 데서 오는 그러한 도덕적 불확실성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현실을 만연시키고 말았다는 것이 김영현 소설의 최종 진단이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유컨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들어선 검투사들임에도 불구하고, 가령 「나는 몽유하리라」나 「개구리」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진로를 모색하지 못하고 안개 속을 몽유하는 사람들로 형상화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당연히 김영현의 소설에서 그런 몽유병자들은 안개로 표상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불편해 하는 자들의 절망과 관계된다. 그리고 이 절망은 마르크스의 이상이 가난에게 일종의 도덕적 권위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게 될 때 마침내 성토와 한탄으로 표출되는데, 바로 그의 소설 전체가 공허한 푸념의 형식이 되고 있는 이유이다. 그 안에는 하늘정원이니 가나안 프로젝트니 하는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의 유산도 들어 있다. 그러나 김영현의 소설은 그런 푸념의 형식에서가 아니라 그 푸념에 이끌리는 태도에서 더 큰 문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내용과 상관없이 푸념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현실이지만, 그 푸념에 대한 동정은 소위 좌파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도식화가 촉발하는 관념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시금 관념적 이상에 대한 미련으로 현실의 아이러니를 추인하는 포장마차의 사내를 떠올리며, 나는 「라일락 향기」에 나오는 사내처럼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집 마당에 라일락을 심는 일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일을 도덕의 향기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단지 나만일까?

 

우리 시대에는 도덕적 향기의 소유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향기에 대한 갈망조차 아주 희귀한 재능에 속한다. 특히 광범위한 분야에서 자유주의적 관점의 지지자들은 아이러니의 도래로 인해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리고 만 도덕을 거론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시대착오라고 믿는다. 일정하게 공정성을 보여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이러니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 폐허는 언젠가 새로운 윤리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그들은 마치 감기는 약이 없고 그저 잘 앓고 나면 면역력을 보강한 새로운 건강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를 그런 감기의 병리학으로 이해하려면, 1년에 한 두 서너 번 걸리게 되는 감기와 항시적으로 겪어야 하는 감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감기는 만병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도덕은 잘 써야 약이 되지 잘못 쓰면 독이 될 수 있다. 일종의 파르마콘인 셈인데, 물론 지금 이 나라에는 도덕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부여받았고 또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칸트적 의무 윤리의 요청보다는 그들이 악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쉬운 원죄를 지녔으며 그래서 도덕적 선택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리주의적 신념이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때 필수적인 것은 행위의 동기가 아닌 결과들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상위의 기준, 즉 공통감각이다. 내가 역시 최근에 읽은 손홍규의 새로운 창작집 『봉섭이 가라사대』(창작과비평사, 2008)는 바로 그런 현실적 기준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가령 두 논다니의 대화에서 그것은 암시적이다.

 

아영은 최집사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랄하네.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엄마한테 사내들 소개시켜주고 소개비 뜯어먹은 거.”

최집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진작에 파묻어버릴 수도 있었어.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밝힐 수 있어? 그럼 모른 척하고 이 촌구석을 떠나줄 테니까.”

최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용기도 없는 게 상도 운운했어? 하여튼 상식들이 없다니깐. 퉤! 야, 그거나 줘봐.”

“······?”

“너 맨날 끼고 다니는 이스라엘 삼국지 말이야. 참, 목숨으로 못 갚으면 돈으로 갚아야 하는 거 알지?”

 

단편 「상식적인 시절」에 나오는 한 장면인데, 어느 소도시 모텔 촌에 박혀있던 논다니인 최집사가 굴러온 논다니인 아영에게 단골을 빼앗긴 뒤 상도 운운하며 드잡이 질을 벌였다가 호되게 당하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작가는 여기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목소리조차 원죄의 낙인이 찍혀버린 상도의 시대에 유일한 도덕은 이기심뿐이고, 그리고 그 이기주의는 해도 너무 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호소할 때만 윤리적으로 교정될 수 있다는 이른바 공통감각을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손홍규의 소설에서 상식이 안 통하는 세상에서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빈번하게 목격되는데, 이것은 결국 그의 소설에서 광우병이니 브루쎌라니 언론에만 나오면 죽는 건 소가 아니라 소를 치는 사람들(「봉섭이 가라사대」)이라는 몰상식한 아이러니를 풍자하는 힘이 되어주는가 하면, 이것을 근거로 가난한 자들이 사는 방식에 대한 비극적 공감을 자극하는 동정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에 대한 비극적 공감은 어느 정도 김영현의 소설이 보여준 바 있는 좌파적 이데올로기의 관념성에서 유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홍규 소설의 희극성이 정치적 도식화의 위험을 알고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욱 나쁜 것은, 인간 행동에서 자유의지라는 의식의 책임을 확신하도록 하는 대신 사회제도라는 물적 조건의 책임을 상기하도록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의 심리학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소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이무기 사냥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도 이무기로 상징되는 불가항력적인 사회적 체계를 가정하고 죽은 시늉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나약한 존재로 스스로를 경험한다. 이것은 그의 희극에서조차 풍자적 활력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결국 손홍규 소설의 도덕성은 음울한 감상으로 떨어지고, 그리고 손홍규 소설의 유머는 과거 김유정의 「만무방」이 그랬듯이 그처럼 상식이라는 최소한의 도덕마저 무너지고 나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유머는 풍자와 다른 문학적 양식이 아니라 풍자가 약화된 양식이다. 따라서 유머는 반대물 간의 상대주의를 합법화한 현실의 아이러니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무력하게 순응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상대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자꾸 상대하려는 우리 시대 병리학의 중핵이다.

 

누군가에게는 철지난 도덕적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부패를 정의의 이름으로 고발하려는 선의가 사법기관을 피해 종교단체를 향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국가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보존이지 변화가 아니다. 문학의 향기가 절실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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