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곤경

자기연민의 유혹

택선고집 2009. 4. 27. 12:23

자기연민의 유혹

 

 

오양진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자존감은 문명화된 존재의 전제조건이자 민주적인 행복의 심리적 토대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아에의 배려라는 푸코 식 권고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정당성과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문화를 살아가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이른바 자기-부인은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억제해야만 건강한 사회적 관계들이 성립한다는 도덕적 이해와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진실한 본성을 억압하지 않을 때 모든 종류의 병리적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정신분석적 파악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자기-부인에서 오는 신경증적 압력은 욕망의 표출을 통해서만 해소된다고 생각하는 속류 프로이트주의가 이 사회의 이른바 시대정신(Zeitgeist)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따라서 우리는 이제 자제력을 미덕이 아니라 악덕으로 간주하는 이상한 세상에 속해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자제력을 가르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식탁 앞에서 떼쓰는 아이들의 단순한 변덕을 난처하게 여기면서도 선택의 주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묻고,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의 제멋대로인 자기표현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며 표정을 조절하고 그들의 잘못과 오류에 대한 비판을 삼간다. 물론 아이들을 윽박지르거나 학생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어른들의 권위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권위가 잔인하고 편협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권위 없이도 지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아동에 대한 아리에스 식 역사가 경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에게 자제력과 분별의 힘을 가르치는 교육적 권위의 이점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자존감의 숭배로 구축된 하나의 사회에서, 자제력에 대한 무관심은 자기표현에 대한 열광과 결합되어 권위와 기준을 부정하는 문화적 방종을 조장하고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려 하지 않는 한국 대중문화의 현저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사실 자유주의적 이념의 지배를 받는 보다 지적인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왔다. 말할 것도 없이, 대학 강의실에서 차이(difference)의 가치가 식별(discrimination)의 가치를 능가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그리고 최근 내가 일하는 한 대학에서 글쓰기를 담당하는 강사들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학생의 발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기묘한 지침을 하달 받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영향력에서 좀 더 직접적이고 확산적인 대중적 지식인들의 메가폰은 훨씬 노골적이다.

 

   예를 들어 요사이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아이돌 스타 빅뱅이 얼마 전 『세상을 향해 너를 소리쳐』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펴내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렸을 때, 나는 한 인기 작가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상업주의적 출판 관행에 대한 일각의 비판을 촌스러운 반응으로 일축하며 그 진솔함을 강하게 옹호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예상과는 반대로, 우리가 그 옹호에서 감지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진정성은 상업주의에 대한 혐의조차 무죄로 할 수 있다는 은밀한 자기변명만이 아니다. 제목이 함축한 자기신뢰의 메시지에 대한 찬동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변명에는 소위 낭만주의적 오류가 뚜렷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기-표현의 존중이라는 전제에서 성급하게 자기-존중의 표현에 대한 무한한 허용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치명적인 오류이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영광을 약속하는 그 오류는 이른바 현대적 영혼의 산고가 시작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사 이래로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질서 사이의 불가피한 간격은 인생의 조건이기를 그만둔 적이 없고, 따라서 개인의 진정성은 누구든 소원대로만 살 수 없다는 인간 운명의 진실성과 다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실존을 면제받으려는 자존감은 사회적 질서가 요구하는 자제력과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한데, 여기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방어하기 위해 자기연민의 감정에 몰두하거나 자기정당화에 진력한다. 나아가 그들은 순전히 개인적인 불행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자유주의적 이념의 후원을 받아 스스로에게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고 심지어 범죄의 윤리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권력의지를 충족시킨다.

 

   사실 자기-존중의 표현과 거의 동일시되는 오늘날의 글쓰기보다 그러한 현대인의 자기기만(bad faith)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실제로 이 시대 대부분의 글쓰기는 개인적 고뇌와 불행을 일반화된 진리로 전환하는 현대적 신문고(申聞鼓)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함으로써 글쓴이가 자기 자신의 불편함이나 불행이 무조건 사회적 장벽에서 오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경험의 보다 깊은 의미를 탐구한다는 진지하고 철저한 문학적 글쓰기조차 여기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요즘 젊은 시인들도 자기표현을 이기적 방종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현대적 글쓰기의 난맥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식품 첨가물의 위해성이 불량 식품보다 브랜드 식품에서 더 치명적인 것과 같은 이치에서 보다 상세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최근 우리 시대 젊은 시인들의 면모를 한꺼번에 일별해 볼 수 있는 사화집이 출간되었다. 『50인의 평론가가 추천한 우리시대 51인의 젊은 시인들』(서정시학, 2009)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에는 50명의 현장 비평가들이 엄선한 51인의 젊은 시인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최근작과 대표작 3편씩을 싣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선정된 젊은 시인들이 쓴 시편들 가운데 상당수는 순전히 문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시가 사회적인 결과를 갖지 않는다거나 현대적인 영혼의 곤경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분명 현대인의 병리적 심리들이 변장해 있는 지하 세계의 창조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징후이다. 우선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오늘따라 어쩐지 나는 그걸 하고 싶다

 

귀이개를 가지고 귀를 팔 때 보이지 않지만 귓구멍에 대해 가지는 구체성,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구멍에 대한 상상력은 의외로 선명하다 확신하면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느끼면서 무언가를 모으고 있다는, 긁고 있다는, 그 시원한 질감으로부터

 

귓밥이 흘러나온다

김경주, 「순장-몽유도원도」 전문

 

   이 시는 여성의 성기를 ‘귓구멍’이라는 낯선 은유적 베일로 위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성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시의 화자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구멍에 대한 상상력은 의외로 선명하다.” 말하자면 1연의 ‘그걸’이 보여주는 야한 환기력은 구멍과 만나면서, 3연의 ‘귓밥’이 가리키는 은유적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2연의 ‘질감’이라는 언어유희의 증거를 통해, 명백하게 시인 자신의 느닷없는 성적 욕망을 표시한다. 그런데 시인은 애욕에 대한 상상력을 표현하면서도 매혹적인 에로스의 유희를 주제로 삼지는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을까? 혹시 젊은 시인은 한 개인의 진실한 본성을 감추는 것은 위선과 기만에 불과하다는 현대적인 사고를 내면화하고 있지 않았을까?

 

   물론 누군가는 내가 요점을 벗어났다고 지적하면서 시의 제목을 환기시키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는 억압적인 사회와 도덕적 권위의 폭력성을 암시하는 순장(殉葬)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서 자연의 진실한 본성에서 유래된 성욕의 솔직한 표현이 가지는 진보적 의의를 말할 것이다. 즉 상속된 과거의 오점에서 해방된 현대적 우리는 간절히 ‘하고 싶다’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인데, 개인의 욕망을 제한 없이 허용하는 사회적 관용에 대한 그러한 쾌락주의적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는 다른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산견된다. 예를 들어 고현정은 갈망하듯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달해 취기를 빨리/ 느끼게 해주는 사고뭉치 압생트”(「압생트, 랭보의 에메랄드빛 하늘」)의 세계를 그리는데, 이곳에서는 대가없이 현실을 ‘수술’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박미산은 아예 세상으로 내려오는 일 없이 “하늘을 가르며” “두려움 모르는”(「날아라, 수만 개의 눈으로」) ‘꽃의 나날’을 살고자 한다.

 

   이처럼 자기표현을 존중하는 관대한 공간에 대한 이상이 선택되면 한 가지 커다란 이점이 생기는데, 바로 그들은 사회적 관계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주의적 진공 속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도덕적 단자들이 될 수 있다. 이때 그들의 문학은 마침내 사회적 실존이란 개인적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정하거나 회피해야 할 대상이라는 철없는 유아론(solipsism)에 완전히 젖는다. 따라서 젊은 시인들은 자신들의 몽유도원도가 개인적 욕망들이 서로 다투는 사회적 발칸 반도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떠올릴 수가 없다.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이 아니라 망상이 진짜 세계가 되는 유아론적 관념에 대한 매혹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상처 입은 자아의 고립이다. 하지만 자아의 욕망은 정당하기 때문에 여기서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시적 감정은 자기연민이 된다.

 

면접 보고 오는 길에 유채꽃밭 지나왔어요 샛노랗게 질린 사월이 내내 따라왔어요 황사 지난 유등천 물결이 바람을 뿜어 올렸고요

 

공황장애-군대면제, 병력만 보지 말고 노랗게 꽉 찬 내 속 좀 봐달라고 애면글면 쳐다봤어요 내 목숨은 노란색인데

 

그 안경에 걸터앉은 흰자위 좀 치우고 제발

 

박진성, 「유채꽃밭」 부분

 

   이 시는 색채의 상상력을 통해 입사(入社)에 실패한 자의 절망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시인은 생활난의 해결을 위해 면접에 나섰지만 ‘노랗게 꽉 찬 속’은 보지 않고 군대면제와 병력 등만을 까다롭게 따지는 세상의 눈초리 앞에 좌절하여 ‘샛노란’ 절망을 안은 채 천변을 걷는다. 그런데 세상이 진실과 내면의 가치에 맹목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의 절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유감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대한 원망과 결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세상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지 자신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인데, 그 결과 시인은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모든 것을 고양시키는 대신에 절망과 한탄에 대한 낭만주의적 순응으로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 자기연민은 자기를 극복하여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초라하게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된 그러한 사람의 심리적 의지처가 된다.

 

   그리하여 “정말 되는 일도 없구나, 백수처럼 살아오며 깨달은 결론”(최금진, 「마흔 살」)을 통해 ‘피해망상’에 빠진 젊은 시인들은 전시적인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의 불운과 불행을 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 자신들이 전혀 잘못이 없음을 말하기 위해 자신들이 전혀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박후기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모래알 같은 생쌀을 씹는”(「철거」) 철거민을 노래하고, 이기인은 아기를 태운 유모차의 행방에 이어지는 “기다란 대출상담 번호표”(「돌다리」)를 통해 지하 셋방의 빈곤과 생존을 보여준다. 물론 그들의 어조를 지배하는 것은 자기연민의 감정과 경쟁하는 동정이다. 하지만 이 동정적 상상력은 자기연민의 감정을 살짝 감춘 채 우리 모두의 무능과 빈곤은 잘못된 사회에 의해 철저히 악용 당한 결과라는 점을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월세 10만원에 잠만 자는 방이어도. 짐이라곤 옷가방 하나라도. 사랑합니다.”(장이지, 「다녀왔습니다」)라고 적는 것이 가능해진다.

 

   결국 젊은 시인들은 자신들의 글쓰기를 경험의 보다 깊은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바친다. 그리고 이 자기 방어가 낳는 것은 부당한 사회에 반대하여 마음의 도개교를 들어 올리고 꽁한 자기연민 속에서 자신들의 무능과 빈곤이 누려야 할 행복에 대해서만 염려하는 것인데, 간혹 이러한 옹졸함이 유대의 대상을 발견할 때는 일종의 비의적인 결사체를 모의하기도 한다. 박상수가 말하는 ‘장미 십자회 중창단’(「장미 십자회 중창단의 여름」)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정당성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미 예상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유대감은 어떤 경우에는 자기연민의 감정을 아주 적대적이거나 호전적인 것으로 만든다. 가령 여기 끓어오르는 애욕에 사로잡힌 클림트 풍 연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라.

 

‘물속의 물고기들은 목마르지 않아서 좋겠다’ 라고 혼자 되뇌었다

 

 ㅡ하지만 당신과의 관계를 엄마가 알게 된다면 당장에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거예요

 ㅡ걱정하지 마 그녀가 당신을 해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없애버릴 테니까

 ㅡ그만 둬요 바보같이…… 엄마를 죽인 남자와 섹스하고 싶진 않아

 ㅡ무슨 소리야 그러면 나는 앉은뱅이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을 거라 생각해?

 

 ‘저기 봐, 밤이 오고 있어.’

 

ㅡ황병승, 「아름답고 멋지고 열등한」 부분

 

   여기서 목마름을 모르는 ‘물속의 물고기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먼저 우리는 이 대화에서 자연의 참된 본성과 자기 감각의 진실한 느낌들이 항상 충족되는 낭만적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를 엿보게 된다. 이어서 우리는, 만일 그 트리스탄의 순간을 누구든 방해하려 한다면 그를 법과 질서를 거스르는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라도 제거할 수 있다는 미친 생각을 듣게 된다. 츠바이크는 미친 감각은 미친 생각을 낳는 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자기연민의 감정에서 떠올린 자기정당화의 격분은 자기만족을 위한 어떤 행위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시도들로 사회적 관계의 정당한 부담에서 오는 개인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생각은 사춘기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에서 인생의 ‘밤’에 떨어지게 되는 유다의 키스와 연관되는 것이지 어른의 지혜에 순응하는 데서 감각적 풍요를 더불어 얻게 되는 베드로의 그물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자기연민의 수세적인 감정이 자기정당화의 공세적인 분노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자기기만이 필수적이다. 그러니까 박연준은 「웅크리다」에서 웅크리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과의 유대감을 표명하며, 앞으로 진정한 빛으로 다가올 ‘태양’에 대한 낭만적 기대 속에서 현재의 어두운 밤을 장식하는 ‘별들’의 위선적인 반짝임은 “모두 떨어져야 한다”고 독설을 내뱉는데, 자기연민과 결합된 이 공격적인 자기정당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승원의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자기기만이 요구된다. “스쿠터를 타던 남자가 앰뷸런스를 후미에서 들이받았다/ 피를 흘려 더러워졌다 아니 더러워 보인다/ 새로 구급차를 부를 것인가 상처를 준 차에 합승할 것인가”(「인더스트리아의 시민」). 여기서 들이받은 자가 상처를 입은 자로 둔갑하는 자기기만은 일종의 프로이트적 말실수를 통해 드러나 있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은, 잘못된 행동을 한 아이들의 자기변명이 대개 그렇듯이, 자신들의 결백(innocence)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믿는다.

 

   이를테면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하는 일이 ‘순수한 진심’이라면 “어떤 경우도 진심은 아름답기 때문에”(김중일, 「우리 귀 속에서의 거짓 시절」) 그 거짓말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정말 ‘어떤 경우도’ 다 그럴까?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인들은 지금 이곳에서 문학을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평론가들과 합심으로 자기연민과 자기정당화에 기초해 이른바 ‘불만제로’의 사회를 문학의 명백한 목표로 밀고 있다. 따라서 불평거리에 대한 감각이 요즘 문학의 지당한 특성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천을 외면하고 모든 잘못을 세상의 문제로만 돌리는 그들은 자기기만에서 오는 경박한 분노에다가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점잖은 옷을 입히기도 한다. 요컨대 그들에게 행복은, 다음에 인용된 사회주의적 장광설이 드러내는 것처럼, 자기극복의 노력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회적 변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당신들은 우리 시대의 한복판을 점거해 들어갔다

한국사회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헛소문

이 정도면 살기 좋아졌다는 배부른 소리

이젠 문화의 시대라는 편안한 말들 속을

헐벗은 몸으로 가식없는 말들로 점거해 갔다

860만 비정규인생들의 죽음을 먹고 사는 자본의 심장을 점거했고

말장난으로 날이 뜨고 새는 국회를 압도했다

창백한 언론과 지식인들의 복잡한 논리를 단순하게 제압하고

뚫고 들어갈 필요도 없이 공권력의 중심에 놓였다

가장 평범한 이들이 가장 민주적이며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 가장 진실에 가까우며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꿈이 가장 혁명적이라는

역사의 희망을 진실을 지켜주었다

 

ㅡ송경동, 「점거는 끝나지 않았다-이랜드·뉴코아 여성비정규직 투쟁 300일에 부쳐」 부분

 

   이 혁명주의자 시인은 그다지 단순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사람들과의 단순한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분노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가장 민주적이며” “가장 진실에 가까”운 자신들은 “한국사회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이 정도면 살기 좋아졌다는 배부른 소리”를 지껄여대는 이 기만적인 사회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노는 자기정당화의 연료이고, 자기정당화는 장광설의 추진력이 되어 있다. 시인은 낭만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념을 통해 자존감을 표현하고 관철하려는 모든 사람의 훈련되지 않는 노력들도 ‘역사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면, 비정규직은 없어지고 또 자의적인 인사권에 기인한 부당 해고의 폭거는 사라질까?

 

   이처럼 자기연민의 유혹에 굴복하면, 자기반성은 정지할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운명의 힘을 숙고하지 않고 자유로움을 구가하려는 현대적인 영혼은 심지어 자신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하고 법과 질서를 거스르는 데서 진정한 시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유로운 것은 저질 시인들뿐이라는 시오랑의 말은 너무 지나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심령의 가치는 높이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데 있다는 몽테뉴의 말은 여전히 온당하다. 물론 젊은 시인들의 자존감과 자기연민은 정의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만한 것이라는 사실이, 나의 혹평을 악의적으로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나 사기꾼이 아니고, 누가 그릇된 칭찬을 즐기며, 악평을 두려워할 것인가? 내 눈길은 좋은 것을 발견하지만, 내 손길은 나쁜 것을 추적한다. 나도 자제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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