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비유들
오양진
오늘날 보수적인 새침함에 대한 완강한 거부는 과거 사랑하는 사이라고 불렀던 관계에 지배적인 태도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사랑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그런 새침함은 사회적 의무와 제한들에서 초래된 신경증적 반응이나 개인적 감정과 욕구들의 자연스런 표출을 감추는 일종의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솔직함만이 진정한 것이고 미덕이 된다는 것인데, 실제로 우리 시대의 연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과 욕구를 말하는 일 사이에 차이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랑을 통해 신혼의 잠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혼전 잠자리에서 사랑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이제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는 사랑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법은 도발이 아니라 하나의 상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셀로의 질투는 권위주의로서 섹슈얼리티를 억누르는 정신 병리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의무의 굴레 바깥에서 사랑과 섹스를 결합할 수 있게 된 우리의 솔직한 자연인들은 더 자유롭고 행복해졌을까? 물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특별한 노력을 쏟게 되는 어려운 구애의 과정을 생략하게 된 일은 성 관계를 손쉬운 오락거리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좀 더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한 성적 자유가 짜릿한 감각과 애틋한 신비를 절멸시킴으로써 그들의 자유로운 사랑을 행복감이 아니라 권태로 채우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자연인들은 성과 사랑이라는 행위를 아주 지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위대한 아이러니를 이룩한 셈인데,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 애정의 유통 기간이 극적으로 단축된 것은 그 위업이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대의 사랑은 시장의 소비 풍조를 닮아가고 있다. 이를테면 단기적인 충동구매가 언제나 가능하고 장기적인 비전에서 구입한 물품도 버릴 때는 아주 손쉽게 버리는 소비 풍조와 오늘날의 사랑은 두 손보다 더 흡사한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의 연인들에게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라는 말은 사탕발림이 아니라면 아주 유별난 각오로 치부된다. 물론 그들은 헤어질 때쯤엔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널 사랑했어!”라는 회고적 영탄을 뇌까리기 일쑤인데, 의도는 뻔하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새로운 성교를 방해할 감정적 부담을 깔끔하게 처리하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눈먼 자기망각이 상대에 대한 즉각적인 망각으로 대체된 셈인데, 결국 권태는 유희를 통해 상쇄될 수밖에 없다. 토크빌의 말처럼, 영원한 삶을 단념한 사람들은 하루밖에 살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루살이의 비전은 우리 사회가 전자 미디어들에 매몰됨으로 해서 더욱 더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빠르고 선정적인 장면 전환으로 구조화된 전자 미디어들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와 같은 구호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대며 지속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붕괴시키고 연인 관계를 순간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 되도록 함으로써 사랑의 유희적 특성을 다른 어느 곳보다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아이들은 모든 관계가 단지 일시적일 뿐이며 변하기 쉬운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가정 속에서 성장하고, 또 우리의 젊은이들은 상대를 선택하는 일과 관련해 내일을 고려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헛되다는 의식적인 결론 속에서 연애를 시작한다. 연애를 믿지 않으면서 연애하려는 사랑의 냉소주의가 번성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데, 어쨌든 이 시대 이 사회의 사랑은 즉흥적이고, 강렬하고, 변화무쌍하며, 따라서 아주 거친 유희가 되어 있다.
여기서 미당 서정주가 쓴 다음과 같은 시행들을 떠올려 보는 일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지 모른다.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벼갯모에
하이옇게 繡놓여 날으는
한마리의 鶴이다.
그의 꿈 속의 붉은 寶石들은
그의 꿈 속의 바다 속으로
하나 하나 떠러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寶石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이 자며 벗어 놓은 純金의 반지
그 가느다란 반지는
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
그의 꿈을 고이는
그의 벼갯모의 금실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 오기 위해
나는 또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은 주무시고」 전문
마지막 연에서 금실의 둥근 테두리는 당연히 결속된 사랑의 안정감을 뜻하는 ‘반지’의 환유이다. 그런데 우리는 4연에서 그러한 안정감이 “님이 자며 벗어 놓은” 반지에서 보게 되는 감정적 혼돈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무엇이 사랑을 불안하게 하는가? 그가 잠들 때만 ‘한마리의 학’처럼 자유로울 수 있고 또 그의 꿈속에서만 ‘붉은 寶石’ 같은 그의 열정이 자기 것이 된다는 암시로 미루어 보건대, 그것은 분명히 그의 새로운 열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화자의 마음은 붉게 빛나던 열정들이 하나 둘씩 가라앉는 시간의 각성 속에서 매번 상기되는 그와의 고통스런 ‘이별’에도 불구하고 다시 금실의 테두리로 돌아와 내려앉는데, 이것은 ‘純金의 반지’에 대한 믿음으로 깊게 숙려된 인내의 착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반지의 비유를 통해 사랑이 영원에 대한 동경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깊은 부분은 열정이 미덕과 결합될 때 열린다고 말한다.
이처럼 도덕적 비전과 결합된 사랑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열정을 거쳐 덕을 향해 가려 애씀으로써 인생에다 존재의 깊이를 부여한다. 많은 문학작품이 사랑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고, 따라서 고통과 인내의 항상성은 사랑의 불가피한 정수라는 진리들을 다루어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훌륭한 문학들은 지금껏 정열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승화시킨 형태로 은밀하고 에로스와 결부됨으로써 지금껏 사랑의 이야기에 갑작스러운 매혹과 거역할 수 없는 욕정을 포함시키는 경우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고통스러운 숙고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학들이 받아들이기에는 특별히 난해한 교훈처럼 보인다. 오히려 최근의 한국문학은 거친 유희로서의 사랑을 유행으로 만든 사회적 추세를 경쟁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근래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사랑을 테마로 한 시편을 연재하는 작업에 70명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시인들이 참여해 완성한 일종의 전자 시집은 그것의 적절한 예가 되어준다. 『시, 사랑에 빠지다』(미디어다음&현대문학, 2009)가 바로 그것인데, 반신반의로 뒤적이던 그 시집에서 실제로 즉각적인 성적 만족과 사랑을 혼동하고 열정이 미덕과 분리되며 권태를 유희로 상쇄하는 사회적 풍조에 대한 모방들을 목격하는 순간, 나는 그저 멍하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가운데 여전히 많은 시편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자 미디어에 협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당의 반지와 같은 해묵은 비유들로부터 결과한 진정한 에로스에 대한 이해를 일정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시인들의 경우, 특히 비관습성을 예술적으로 신봉하는 젊은 시인들일수록, 그들의 진보적이고 새로운 비유들은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이끌었다. 몇 편만 읽어보기로 하자.
사랑할 때 우리의 입은 늘 한목소리였다. 사랑할 때 우리의 손은 늘 한 손깍지였다. 그로부터 벙어리장갑 한 짝이 내 것이라 배달되었을 때 나의 두 심장은 박수 치는 심벌즈처럼 골 때리는 콤비였다. 이는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나 개야, 개나 물어뜯을 놀잇감 준비하느라 오래도록 당신 참 수고하셨겠다, 죽어라 그니까 개 줄라고.
―김민정, 「벙어리···장갑」 전문
먼저 “벙어리장갑 한 짝”을 배달함으로써 이별의 의식을 치르려는 ‘당신’이 있고, 이어서 그 말 없는 물증을 통해 실연의 감정을 산뜻하게 정리하겠다는 그런 애인에게 거친 분노를 표출하는 화자가 나온다. 만약 열정과 분노가 모든 사랑에 수반되는 감정적 굴곡을 요약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열렬한 감정이 상처 입을 때 쏟아내는 격렬한 분노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분명 참을성 있는 지혜를 통해 존재의 깊이로 침잠하는 사랑도 있지만, 반대로 상처 받은 마음에 매몰된 채 자기 위안의 분노로 폭발하는 사랑도 있다. 따라서 결별한 애인을 향해 야유 섞인 분개로 저속한 말들을 뇌까리는 화자의 모습에도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이 시는 열렬한 연애의 결렬로 상처 받은 사랑이 빠지게 되는 감정적 진실의 일단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김민정의 시가 어떤 아이러니를 의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지만, 사실 그녀의 시는 진실보다는 특별한 종류의 심술을 담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결렬된 사랑의 이별을 위한 의식을 접한 화자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의 심장이 “박수 치는 심벌즈처럼 골 때리는 콤비였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잘 암시된다. 말하자면 벙어리장갑 한 짝을 화자의 소유로 오인한 애인의 무신경한 ‘수고’가 온전히 하나였던 사랑조차도 사소한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화자는 자신의 분노를 계몽된 냉소로 바꾼 것인데, 결국 정신적 요소를 위해 의식의 요소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그런 계몽된 사람들은 이별에 대해 순전한 고통으로 깊어지기보다는 결별에 대한 냉소적 환호로써 “내일을믿은게사실인가요”(황성희, 「실연」)라고 물으며 사랑을 단순한 유희로 만들고 만다. 그것도 “개나 물어뜯을 놀잇감”으로 말이다. 분명히 이 파격적인 비유의 영향은 우리를 아이러니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이끈다.
이 연애편지에서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밤바다의 등대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매우 어려운 것을
꿈꾸는 눈동자나
노래하는 심장과 함께
그때 우리는 열렬해
외롭기도 해
그랬지, 나는 오래전에 너의 창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다
갔지
세게 두드렸으면 유리창쯤 깨졌을 텐데……
피도 봤겠지
너도 봤겠지
오버over하는 건 연애의 본질일까, 실수일까
지우개는 아직 하얗고
밤중에 밀려나오는 지우개 가루는 검다
모래로 쓴 글씨처럼
애써 지울 필요도 없어!
우리는
내일 또 지워진 후에 아주 옛날식 연애편지를 쓰자
―김행숙, 「연애편지를 쓰자」 부분
사랑이 유희가 되는 순간이 여기 또 있다. 이 시는 우선 사랑에 대한 일종의 제유가 되어 있는 ‘연애편지’를 통해 연애의 어려움 때문에 생겨난 열렬하면서도 외로운 ‘소망’을 말하면서 연인의 창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조심스러운 행위와 사랑을 결부시킨다. 그리고 묻는다. 만일 그 창문을 깨고 경계를 넘는 출혈의 연애라면 어떨까? 시인은 아마도 ‘피’를 보게 되는 육체적 합일처럼 “오버over하는 건” 연애의 ‘실수’라고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성적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연인관계에서는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사랑의 불만이 싹트기 마련이다. 따라서 굳히기가 느슨함을 불러오는 그런 사랑의 역설을 피해 가기 위해서는 서두름과 단순함은 완만함과 세련됨으로 대체되어야 하는데, 이때 에로스는 말할 것도 없이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연애편지와 같은 예의와 복잡성의 요소로서 욕망의 실현을 유예하는 에로티시즘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욕망의 충족은 사랑을 손상시킨다는 이 에로스 숭배자의 관념에는 일정한 진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김행숙의 에로스는 단지 에로스의 진실을 가리킬 뿐 사랑의 진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래로 쓴 글씨”에 비유된 연애편지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애써 지우려는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언제든 새롭게 쓸 수 있는 유희적 에로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상태의 성과 관계 맺지 않는 유희적 에로스는 불가피하게 현실의 특정한 연인이 아닌 막연한 상상의 연인과 결부됨으로써 사랑이라는 필요의 유희에 이어지지 못하고 에로스라는 감상의 유희에 한정되고 만다. 다시 말해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는 에로스를 마치 행복의 유일한 처방전인 듯이 간주함으로써,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불행을 나누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 없이 행복을 누리겠다는 이기적인 심산을 드러내게 된다. “마중 나가는 일에는/ 질식하지 않”(김경주,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으려는 에로스는 결국 “아주 옛날식”이기는커녕 너무도 현대적이다.
돌능금 나무둥치에 세들어 살고 싶다던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 고여 있어 그 목소리는 바다에 내리는 눈, 적도의 만년설, 얼음집 내벽 녹았다 다시 얼어붙은 물방울, 너는 잠시 빛나고 나는 적막을 품고 허기의 기록들이 마침내 느슨하게 흐르고, 달빛의 윤곽 너머 안개 낀 밤의 아늑한 사라짐들, 반역들, 불분명한 용서들 고대이자 후대인 바람의 화석이 무수한 시간의 문을 찢고 떨리는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올 때,
우리는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 서로의 지형도를 숨긴 채 표적을 향해 달려들지만 대열은 흩어지고, 표적은 간 데 없고 게릴라성 호우와, 수치심에 대해 바람의 일행으로 다만, 먼 훗날 빙하에 갇힌 채 얼어버린 바람의 혈전으로 내 사랑의 저격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문혜진, 「몰이꾼과 저격수」 전문
이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또 어떤 것인가? 이 시가 제시한 답은 ‘바람의 화석’이나 ‘바람의 혈전’이라는 비유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은 한마디로 진화에 의해 형성된 인간 행동의 내재된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바람’이 의도하는 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생물학적 자연주의인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근본적인 목표를 어떤 개체의 유전자를 가능한 한 멀리 퍼뜨리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니 사랑에 연루된 자들은 하나같이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바람의 일행’으로서만 사랑을 ‘완성’하게 되는데, 결국 사랑으로 빚어지는 인간적 매혹들, 가령 연인의 침묵과 부재와 배신, 그리고 용서 등은 시의 마지막 의문에도 불구하고 모두 바람이라는 야만성으로 환원된다. 정말이지 사랑에 대한 시인의 표현은 냉정하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한 점 의혹도 없는 생물학적 자연주의와 사랑의 신비를 뒤섞고 있는 문혜진의 비유는 사랑의 오래된 미래로서의 바람이라는 관념으로 자신의 시뿐만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크게 손상시킨다. 왜냐하면 그녀의 시가 보여주는 자연주의적 필연성은 사랑과 관련해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혀 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단지 ‘배우들’(황병승, 「궁극의 애정신Scene」)일 뿐이라는 것인데, 시인은 마치 수천 구의 시체를 찢고도 영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 독일의 어느 해부학자를 닮아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의 모든 매혹적 광경들을 이기적 유전자의 위장된 성욕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리고 생물학적 각성을 통해 신화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을 진화론적인 연대기로 대체함으로써, 그녀는 사랑의 필수요소인 초자연성이라는 정서를 파괴하고, 나아가 사랑을 아주 하찮고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요컨대 사이비 과학의 냉소주의를 철저하게 따라가다 보면, 사랑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로지 욕정만 남게 된다.
이처럼 사랑의 시를 짓는다고 해서 언제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비유의 양상을 통해 사랑에 대한 그들 인식의 내밀한 부분을 엿봄으로써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은 세속화의 문제들을 치유하는 유일한 초월성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고, 문학은 그런 인식을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거의 독보적인 수단이었다. 그런데 수단을 자율적인 것으로 만들고 오락적 가치밖에 없는 새로움을 신봉함으로써 문학은 치유의 보루가 아니라 마침내 치명적인 병리의 일부가 되었는데, 우리는 오래전 어느 그리스 시인이 떠올렸던 질문을 다시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물이 목에 걸리면, 무엇으로 그것을 씻겨 내릴 것인가.” 전적으로 자율성과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문학은 결국 사랑을 통해서도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말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요즘에는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그리고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보이게 둔갑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오래된 연시들은 아무리 진부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 연만 읽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현대적인 연시들보다 더욱 큰 기쁨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실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분별없으면서도 세련된 취향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평론가들은 그런 현대적인 연시들을 속으로는 분명히 싫을 텐데도 겉으로는 온갖 미사여구로 예찬한다. 이것이 단지 도덕적인 아름다움에만 매료되어 있는 사람의 고집스런 편견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오늘날 한국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그런 사랑의 형이상학보다 사랑의 진실에 대한 계몽된 각성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