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윤리
오양진
이제 우리 시에 대한 미래파적 이해는 논란거리조차 못 되고 있다. 무시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용인되었기 때문인데, 뉴웨이브로 불리기도 하는 우리의 미래파는 자신들의 문학과 입장을 상징적인 사례가 될 때까지 과장하고 선전함으로써 그것을 성취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힘센 문학은 언제나 금기를 깨는 도발적 상상력에서만 자신의 새로움과 창의력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미래주의적 전위들의 차지였다는 점에서, 사실 그러토록 과장과 선전에 열을 올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하긴 아방가르드들의 유희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 가운데 언론 플레이만한 것도 없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미래파는 오래된 미래파인 셈이다.
당연히 우리의 미래파들에게도 비관습성은 문학의 전제이고, 위반과 일탈은 문학의 원칙이며, 그리고 경계 없는 삶은 문학의 목표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들은 습관적으로 경계를 부수고 평론가들은 유보 없이 그들의 독창성을 칭찬하는데, 미래파의 시인과 평론가들은 심지어 범죄와 부정조차 비관습적이라는 이유에서 미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관습성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금기에 대한 위반과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은 미학적 형식일 뿐 사회적인 내용은 갖지 않는다는 것인데,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 타조의 어리석은 알리바이와 같다. 미학이라는 구멍에 머리를 넣을 수 있다면 사회적 영향이나 결과들과 무관할 수 있다는 확신은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 우리 문학계는 어느 때보다도 윤리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다. 2005년 문학의 윤리로부터 2008년 몰락의 에티카에 이르는 새 천년의 윤리 애호증에서 누군가는 금지를 금지하자는 미학적 급진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의 윤리주의는 문학의 존재근거를 아름다움이 아닌 인간다움에서 발견하는 각성된 알리바이가 아니라, 관형격 조사 ‘의’가 나타내는 것처럼, 문학이 윤리를 전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유독한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윤리만이 진정성을 갖는다는 이른바 다른 윤리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몽상을 은폐한 것인데, 이것은 도덕을 넘어선 도덕이 가능하다는 바타이유의 문학주의적 오산을 반복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에서 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도덕이 아니라 무질서이다. 다시 말해 미래파와 문학주의자가 만나 담소를 나누는 상대주의적 윤리학이라는 카페보다 더 윤리에 나쁜 공간은 없다. 사실 문학적 윤리학은 최근 윤리라는 말이 달리고 있는 사회적 진로의 원인이기도 하고 징후이기도 하다. 윤리는 과거 지혜, 예리함, 분별력, 올바른 판단 등의 의미를 포함했는데 반해, 오늘날은 아둔함, 가부장제, 동성애 혐오, 엄숙주의 등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흥부전』에 대한 해석의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정이 가져다주는 이점들 가운데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도덕의 무게로부터의 해방이다. 요컨대 윤리에 대한 문학적인 냉소와 경멸의 인기는 제도의 과잉억압을 제거해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소망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욕구들을 제한하는 도덕적 정언명령을 파괴하여 개인적 방종의 범위를 증대시키려는 욕망의 소산이다. 문학의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이제 일종의 도덕률 폐기론을 공공연히 표방하거나 최소한 암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최근 우리 문학은 과거의 윤리적 유산으로부터 해방된 자아의 고무를 통해 사회적 의무를 참조하지 않고도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있다. 심지어 윤리를 아무런 의미도 없고 보존할 가치도 없으며, 나아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찔러야 할 공공의 적으로까지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관계할 공산보다는 홉스적 이리의 공간에 이어질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어쨌든 우리의 시인과 작가, 그리고 비평가들은 저마다 앞 다투어 사회적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도덕적 모나드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내가 요사이 읽은 두 권의 시집이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 속에서 왜곡된 윤리학의 사회적 영향을 짐작하는 데 그 시집들은 일종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전문
이 시는 허연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의 표제작인데, 여기서 시인은 자아가 곧 법이라는 유아론적 윤리학을 넘어서 심지어 나쁜 자아야말로 진정한 법이라는 악마적 윤리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물론 낭만적 유치함을 보다 더 위험한 진지함으로 바꾸려는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한마디로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허무주의는 시인이 ‘사는 게 뭔지’ 하는 생각들을 점철하는 거의 유일한 테마이다. 그에게 인생은 “절대 고독 안에 뒹굴고 있는 입석들의 폐허”(「슬픈 빙하시대 5」)이고 “소멸을 형해 가는 침울한 술렁임”(「등뼈로만 살기」)이며 “몹쓸 것 천지인 세상”(「길바닥이다」)이자 “결국 쓸쓸한 거”(「일요일」)로 간주된다.
그런데 시인은 삶과 현실에 대한 그와 같은 허무주의를 불합리해 보이는 증오로까지 끌고 간다. 내 생각에 사람들은 그것을 시인의 또 다른 시들 「경계선의 나무들」이나 「천국보다 낯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거기서 “서 있는 자리가 바뀌지 않는 이상 / 죽어도 구원은 없다”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건 죄악”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마침내 “말라가는 것이 생(生)의 전부”(「멸치」)인 무가치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저항과 혁명에 관해 언급하는데, 우리 모두는 “역적이지도 무사이지도 않은”(「도시에서 꽃을 꺾다」) ‘무심한 비둘기’처럼 그런 세상과 공존하며 사는 대신 “세상의 멱살을 잡아 / 빌딩 밑으로 던져 버리”는 ‘파이트 클럽’(「파이트 클럽」)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쁘게 행동하라, 이것은 바로 무가치한 세상에 대한 시인의 윤리적 답변인 셈인데, 끔찍하게도 이 낭만적 유나바머의 행동강령을 오늘의 미학으로 합법화하는 일은 너무도 쉽다. 말하자면 삶의 무가치에서 야기된 파편 같은 현실의 유리 조각을 그 삶을 타격하는 무기로 삼는 것을 위악적 부정이라는 문학적 의의와 결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일까? 낭만적 이유에서 나쁜 행동만이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악마적 윤리학은 정말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해도 없는 것일까? ‘세상에서 쫓겨난’ 그가 자기비하에 빠진 소심한 자아 속에 유폐된 채 세상을 관조하는 체념적 허무주의자로 처신할 때는 일단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절망을 세상의 절망이라 강변하는 자기기만의 강한 자아로 변신하여 결국 ‘세상을 쫓아내는’ 파괴적 허무주의자로 운신하려 할 때의 그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때 그는 언제나 사실에 대한 신념의 차이를 윤리의 차이와 혼동함으로써 윤리를 복수형으로 이해하는 귀납적 오류를 보여주는데, 사실 허연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신념은 새로운 윤리학이기는커녕 인간의 사악한 본성 중 하나인 이기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파이트 클럽」의 시적 자아가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없고 / 욕망을 충족할 수 없다면 / 차라리 파괴해 버리자”고 노래하는 것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처럼 시인은 명백히 금기를 모르는 자유에 대한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세상은 기필코 파괴해야 한다는 이기주의적 신념을 문학적 윤리학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세상을 무가치, 상스러움, 먹고 먹히는 경쟁, 지리멸렬, 영혼 상실 등으로 난분분할 뿐인 죄악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죄 많은 세상에 대한 범죄적인 속죄를 헛된 세상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이 유의해야 하는 조언이자 심지어 도덕적 운동으로까지 격상시킨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윤리적인 범죄는 결코 모순형용이 아닌데, 그렇지만 만일 자기연민의 절망으로 완전히 약해지지 않고 문학적 성격으로 오히려 자기 내부에 억눌린 어두운 힘들을 강화시키는 시도가 도덕적 권력이 된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일을 취소하고 자기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기담(奇談)」 전문
윤리를 부정하는 윤리가 여기에도 있다. 위의 시는 김경주의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의 표제작인데, 일단 나는 내가 만든다는 낭만적 에고의 윤리학이 충격적인 이미지로 암시된다. 한 인형이 탯줄을 자기 안에서 꺼내고 있는 기이한 장면을 보라. 하지만 인형이라는 말에서 이미 그것은 허망한 유령의 윤리학이 되었고, 시인은 곧바로 자아 이전의 존재론적 매트릭스를 상상하며 자신의 ‘화술’에 지젝 식 이드의 윤리학을 이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존재의 방향과 지표가 되는 지도를 태우고자 하는 도덕적 이유는 명백하다. 초자아의 윤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자아의 윤리마저도 진실한 무의식의 흐름을 억압하는 ‘팬옵티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경주의 시들은 무엇보다도 기성의 윤리학에 지진을 일으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지진이 맨 먼저 폐허로 만드는 곳은 “입 안의 성”(「입 속의 성(城)에서 그가 어두운 거실을 왔다 갔다 한다」), 즉 언어라는 존재의 집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공방에서 줄칼로 입속의 모든 좌표를 그어버린”(「이꼬르들의 천식」) 셈인데, 결과는 이러하다.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 언어의 낭떠러지를 만든 지진은 이번엔 윤리라는 언어의 가장을 급습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인은 “엄마의 무릎에 앉아 내 몸에 있는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혀를 꺼내 피가 나오는 엄마의 잇몸을 꾹 눌러주었다”(「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 시간」)고 말한다. 수치심을 모르는 패륜아, 즉 광인이 그 윤리의 쑥대밭에서 출현하고 있다.
물론 모든 현실을 기만적인 시뮬라크르로 치부하는 워쇼스키들의 사유와 무의식의 진실을 억압하는 윤리적 언어를 문법의 환상으로 쓸어버리는 푸코적 사유에서 볼 때, 이른바 실성의 윤리학은 일종의 계몽된 도덕주의에 해당한다. 미친 듯 행동하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세상이 금기와 규율에 미쳐 있는 한 광기가 진정한 윤리이며 윤리야말로 진짜 광기라는 것을 폭로하는 각성된 윤리학의 유용한 지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기 인식이란 억압에서 오는 기만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정신분석학의 영향도 관계하고 있다. 그런 만큼 시인의 화술이 수치심 없이 제멋대로인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데, 가령 「미음, 미음을 먹어요」의 시인이 “어머니는 그날 아침 이빨 사이에 낀 아버지의 자지털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며 말했다”고 노래할 때 그것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만일 세계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각성이 그와 같이 수치심에 기초한 윤리적 자기인식을 삼켜버린다면, 과연 삶과 현실은 어떻게 될까?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언급하려니까 좀 낯간지러운데, 최소한 싸구려가 될 것이고 최대한으로는 야만주의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충격을 통해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불온한’이라는 비평적 찬사 속에 독창적인 문학으로 간주된다는 점인데, 이것은 사실 유난스러울 것도 없는 현상이다. 실제로 정신병의 윤리학을 선전하는 시인은 기성의 모든 관념을 부정하는 아방가르드의 싹쓸이 스타일을 닮아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의 의도는 보편적 도덕에 대한 정통적 가설과 대립함으로써 충격적이고 독창적으로 보이는 데 있는데, 여기서 시인은 도덕적 상대주의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이기주의와 이념적으로 연대하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동일한 도덕을 다른 방법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다른 도덕이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드는 귀납법의 허위이다.
귀납은 연역으로 가는 방법이 될 때만 진리가 될 수 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리를 상기해 보자. 오늘날 시인들은 도덕의 결함과 관련된 누적된 자료를 근거로 자신들의 중점을 그 자료가 끌어내야 할 연역적 전제가 아니라 자료 그 자체에 놓는데, 그릇된 삼단논법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이때다. ‘모든 도덕은 나쁘다 / 선과 악의 구별은 오로지 도덕에만 기초한다 / 결국, 선과 악의 구별은 나쁘다’는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연역이다. 이것은 새롭고 독창적인 사고의 방법이 아니라, 단지 사고의 정지에 불과하다. 또 다른 삼단논법을 생각해 보자. ‘선과 악의 구별은 가치 있는 삶에 필수적이다 / 선과 악의 구별은 오로지 도덕에만 기초한다 / 결국, 도덕은 가치 있는 삶에 필수적이다.’ 어느 것이 진정한 선의를 담고 있는가?
비평가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시의 윤리’는 기성의 윤리에 대한 반성이므로 윤리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윤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훌륭한 선의를 통해 오히려 도덕성과 사회적 미덕을 파괴하는 자유주의적 지성의 속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내 말의 의미를 눈치 챘을 것이다. 화제가 되는 지적 도발은 신문이나 TV의 토론 대상에 오르고 광범위한 대중을 향해 흘러가 돌이킬 수 없는 지식의 흐름을 이루는데, 이런 방식으로 도덕률 폐기론은 도덕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체스터튼은 언제나 문제는 최후의 연역에 도달하느냐 아니면 아무데도 도달하지 않느냐에 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그리고 또 다행스럽게도 보르헤스는 어디에선가 아무데도 도달하지 않으려는 시인들을 식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한 시인이 어떤 행동을 제안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면, 그가 좋은 시인인지 나쁜 시인인지 알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