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곤경

인생의 조건

택선고집 2009. 1. 15. 12:56

인생의 조건

 

 

 오양진

 

 

  우리 사회에 하나의 망령이 출몰해 있다. 욕망이라는 망령이 그것이다. 특히 이 망령은 존재와 권리는 동일한 것이라는 루소적 자연법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모든 욕망은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따라서 어떤 권위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는,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현대적 이념을 자양분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존재한다는 전제의 직설법에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의 명령법을 도출해내는 현대성의 비옥함은 심지어 욕망이 생겨나면 그 욕망은 즉각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쾌락주의적 가지마저 거침없이 뻗게 만들면서 그 망령된 욕망을 성황당의 나무처럼 웃자라게 한다.

 

  이때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이라는 관념의 가지들은 기술적 발전이라는 축포와 함께 화려한 오색으로 치장된다. 예를 들어 배고픔을 즉시 해결해주는 각종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의 황색, 유선 전화기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통화를 성사시켜주는 휴대폰의 청색, 어떤 장소에서도 유보 없이 텔레비전 시청을 가능케 해주는 DMB의 적색, 그리고 인화 과정의 수고와 기다림을 사라지게 만든 디카의 백색과 길 찾기의 어려움과 긴장을 일거에 해소시켜주는 GPS의 흑색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킨다는 물질적 진보의 명분을 넘어선 기술적 남용의 사례들이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욕망의 충족과 기술적 진보를 혼동함으로써 문명화 과정을 불만이 아니라 만족과 결합하는 경솔한 마르쿠제 식 결론이 만연하게 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현대인에게 문명화와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은 반의어가 아니라 거의 동의어가 되어 있다.

 

  이것은 신용카드 보급의 일반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는 수십 년 전 영국의 한 신용카드 회사가 선전했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유혹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신용의 시대는 욕망의 시대에 대한 경제학적 환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즉각적인 만족이 어느 날 갑자기 독촉 청구서와 연체료, 집달리와 압류의 형태를 불러온다는 이른바 플라스틱 경제의 냉정한 메커니즘은 욕망을 즉시 만족시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낭만적 과대평가가 가져올 현대인의 곤경을 암시한다. 이 곤경은 마치 아이를 가지게 된 데서 애완용 인형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만족을 느끼던 부모가 그 인형이 걷고 말하는 순간 빠지게 되는 곤경과 같다.

 

  예를 들면 작년에 있었던 숭례문 방화 사건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생이 처하게 되는 곤경을 잘 요약하고 있다. 2008년 2월 우리의 소중한 전통 건축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얼마 뒤 그 사건은 평범한 한 노인의 방화로 밝혀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범인은 원하는 만큼 토지보상비를 받지 못했고 여러 번 민원을 제기했지만 소용이 없자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 그리고 현장검증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약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요점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킬 때는 권리를 의무에 앞세우고 그 욕망이 제약받을 때는 의무를 권리에 앞세우는 범인의 행태인데, 결국 그 방화범은 자기 욕망의 충족이 정치적으로 정당하다는 관념이 낳게 되는 것은 천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의 욕망이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은 그 욕망이 순응해야 하는 현실적 의무를 개인의 신성한 주권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사회에 대한 반감과 적의를 합리화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것은 늙은 방화범이 억울함을 말하며 자신이 아닌 사회를 향해 뿌린 시너 테러리즘의 뜨거운 내면일 것인데, 법률적 오류와 사회적 악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삶이 순조로운 것이 될 거라는 낭만적이고 현대적인 이념은 사실 기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만과 좌절은 인간이 바라는 것과 세상이 줄 수 있는 것 사이의 영구적인 불일치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것이지 오류와 악의에서 우연하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자라나온 줄기를 부정하는 가지들처럼 인생의 조건을 왜곡한다면, 특정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어떤 파국을 맞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모종의 이념적 정당화 속에서 사회를 부정하는 치명적인 인생은 현대 소설의 가장 인기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가령 김승옥의 단편 「力士」(1963)에 나오는 주인공도 개인적 욕망의 추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념을 학습한 현대인의 전형이다. 다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개인의 욕망에 대한 낭만적 숭배에서 마련된 이념의 기만적 성격과 파국적 결과를 좀더 분명하게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훈적인 명백성을 갖는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먼저 고학생이자 문학청년인 주인공은 도시 변두리에서 시내 중심부의 양옥집으로 하숙을 옮긴다. 그리고 그는 시종일관 새로운 하숙집의 규칙과 질서가 이전에는 제지 받지 않던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침해한다고 느낀다. 마침내 그는 양옥집 식구들이 매일 밤 마시는 보리차 속에 흥분제를 타며, 자신을 “부자유하게 평온한 마을을 해방시켜주러 온 악마”로 상상한다. 도대체 우편 테러에 사용된다는 탄저균 백색가루와 그 흥분제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여기서 분명한 것은 개인의 욕망과 자유에 사로잡힌 낭만적 몽상이 역설적이게도 테러리스트를 낳는 자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김승옥 이야기의 주인공은 숭례문 방화 사건의 범인처럼 자신에게 부과된 외부적인 규율을 개인의 주권에 대한 부당한 상처로만 인지할 뿐 그 상처의 승화된 해결책을 찾거나 객관적인 태도로 불의를 개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욕망이 대면하게 된 좌절을 자기 바깥의 현실이 가진 오류와 결합함으로써 반사회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이념적 후광을 통해 신성화된 이기주의는 욕망의 좌절에서 오는 불만을 세상의 부당한 압박이라는 추상적인 피해의식과 쉽게 뒤섞을 수 있는 성능 좋은 용매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회를 사무침의 원인으로 오해하고, 급기야 사회에 대한 테러에는 정의롭고 순수한 의의가 있다는 아주 위험한 이념에 헌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승옥은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테러리즘의 이념적 원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하지만 자신의 인물에 대한 설명과 정당화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는 모호한 태도로서 병든 사상의 씨앗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60년대는 개인의 불의보다 사회적 불의가 더 컸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테러리즘의 상대적인 권리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테러가 일상화되면서 자유주의의 위험이 전체주의의 위험을 능가하게 된 오늘날 60년대에 심은 작은 씨앗이 거대한 콩나무로 자라난 것을 목격하는 일은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60년대식 소설을 검열할 수는 없다고 해도 혹평할 수는 있어야 한다.

 

  변장한 60년대식 낭만주의는 먼저 박상우의 『인형의 마을』(민음사, 2008)에서 목격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창작집에 실려 있는 소설들은 그 인형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세상이 일종의 허구라는 현상학적 본질직관의 두레박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길어 올리려는 보드리야르적 시도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 책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을 강조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박상우는 미학적 우수성에 대한 좋은 평판이 사회적 위험성에 대한 나쁜 평가를 충분히 극복할 만한 소설집을 내놓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은 아첨 섞인 호평보다는 진지한 혹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박상우의 인형들은 대체로 사회성을 상실했거나 살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제대 후 방탕한 숙부의 펜션에 기생하며 그를 위해 힘들게 일하다 암으로 죽은 아버지를 종종 떠올리고 인생의 모순을 말하는 「융프라우 현상학」의 젊은이, 삶의 의욕을 되살리고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남자 친구에게 납치 연기를 부탁하는 「인생 작법」의 여자, 그리고 남편의 유약함을 뿌리 뽑겠다며 애완용 강아지들을 차로 갈아버리라고 요구하는 그악스런 아내 앞에서 끝내 죽음을 택하고 마는「야생동물 이동 통로」의 대학 강사 등이 그런 존재들이다. 이들은 악의적인 현실의 압박에서 치욕과 좌절이 유래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상처를 절망에 연결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바로 작가는 그들에게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을 안겨준 인생의 모순을 날려버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말하자면 박상우는 인생의 모순에 대한 안성맞춤의 해결책을 건네주지 못하는 세상은 「독서 형무소」가 우의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희망과 질서라는 거짓이 지탱하는 전체주의적 허울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짝퉁과 가짜의 마을 내지 허상과 아바타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낭만적 환상을 진실과 바꿔치기 한다. 이것을 「노적가리 판타지」는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람 인생은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난 모든 걸 받아들이죠······. 껴안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리기 위해, 오직 버리기 위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을 겪기 시작하죠. 어차피 겪는 게 인생이니까······겪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할 게 없죠. 안 그런가요?”

  “······.”

  “당신도 뭔가를 겪으며 세상을 살아왔을 거고, 뭔가를 겪다가 여기까지 온 거겠죠. 안 그런가요?” “······그렇죠.”

  “겪는 과정은 지랄 같지만······겪고 나서 얻게 되는 건 종교보다 더 성스러워요. 난 그걸 알죠. 저 시아버지는 진짜 시아버지가 아니고, 나와 살던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고, 내 배 속에서 나온 아들도 내 아들이 아니죠. 세상을 겪게 만들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배역······ 우리는 다 등장인물들일 뿐이에요.”

  “비극이로군요.”

 

  이 대목은 원하는 결혼을 반대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다리를 저는 동생과 결혼하려는 여자가 그가 성불구인 것을 발견하고 이번에는 그의 형을 유혹하면서 끝내 패륜에 말리게 된 주인공이, 사실을 알고 자살한 동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며 어느 강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을 노적가리에서 경험한 술 취한 판타지의 일부이다. 세상의 허구성을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듯한 형의 판타지를 통해 작가가 의미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다. 형의 패륜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판단인데, 이런 생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만일 반인반마와 같은 인생의 모순이 완전한 해결책을 갖지 못하는 세상이고,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허구적인 것이라면, 높음과 낮음 혹은 선함과 악함 따위의 가치 체계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결국 악은 선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마니교적 명상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놀라울 것도 없이, 작가는 당위를 모르는 존재들로 충만한 허구적인 삶을 파괴하고 전복하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패륜이나 살인과 같은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범죄들을 심지어 혁명적인 순수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물론 박상우는 완전한 인생에 대한 동경이 정당화한 이른바 마니교적 낭만주의의 위험성을 자각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삶이란 상처들이 점철되는 어쩔 수 없는 고통의 과정이지만 이것은 절망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 즉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함께 인형의 마을을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인형의 마을」을 통해서 보여준 ‘자연적인 나’에 대한 각성으로서 가리키려는 것인데, 하지만 자아와 세상이 인위와 가식 없이 솔직하게 자연을 따르게 되는 방향은 또 다른 위험을 부르게 된다. 현대인들이 종종 저마다의 욕망과 상처를 놓고 솔직해지자든가 터놓고 말하자고 하는 데에는 그것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것이 위험한 유혹이라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인위와 가식을 제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위선을 모르는 솔직성은 천박함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박함은 한 여자의 침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자는 힘없이 말했다.

  “침대가 너무 넓어.”

  “넓은 게 어때서? 침대는 넓은 게 좋은 거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야.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신경쓰지 마.”

  여자는 남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보았다. 새 침대는 두 팔, 두 다리를 다 뻗고 뒹굴어도 될 만큼 넓었다. 그러나 넓고 안정적인 더블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의 불안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치워버린 낡은 철제 침대의 좁지만 아늑했던 공간이 떠올랐다. 여자는 철제 침대가 그리워졌다. 철제 침대는 들어오자마자 처음부터 쉼터를 제공해주었다. 실내의 다른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버린 지금, 새로 들어온 더블침대는 스물두 평의 공간 중에서 마음 놓고 있을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막막해졌다. 마치 벌판 위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참 동안 뒤척거리다가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개와 이불을 들고 방바닥으로 내려갔다.

 

  박현욱의 소설집 『그 여자의 침대』(문학동네, 2008)에 실려 있는 표제작의 한 장면인데, 환멸로 점철된 일 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스물두 평의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아가게 된 여성이 얼마 전에 생긴 섹스 파트너를 위해 오래된 일인용 철제 침대를 버리고 인터넷으로 새로운 더블침대를 주문했다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불편해 하는 대목이다. 결국 그녀는 뜯은 것은 반품 처리가 안 된다는 침대를 어렵사리 추가 배송료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좀더 작은 슈퍼싱글로 교환한다. 에피소드는 단순하지만 소설의 메시지는 아주 의미심장한데, 이 전언은 주인공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침대의 교환 과정을 통해 단도직입적으로 비유된다. 요컨대 만일 반품 의사는 뜯어보아야 결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사용 후의 반품이 당연한 일로 수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결혼에 관한 지나친 도덕의식과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자연스럽지 못한 오류와 악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상 수상과 영화화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장편 『아내가 결혼했다』(2006)에서 작가가 이미 두드러지게 지적한 바 있다. 결혼 제도와 사회적 통념에 대한 비평을 자극하는 박현욱의 소설들은 사실 입센이 노라를 통해 설득하려고 한 현대적인 주제를 상기시킨다. 입센과 박현욱의 관계는 보드리야르와 박상우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현욱은 가정을 부수기보다는 보수하기를 원하는데, 다만 여기에는 사고의 냉소적 전환에 대한 혁신적인 주문이 수반된다. 가령 「그 사이」의 주인공이 암시하는 것처럼 결혼이란 비유컨대 괴로움의 대사량을 증대할 방법이 없는 비극적 요요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생명의 전화」에 나오는 이혼 경력을 가진 독신남이 주장하듯이 기대와 환상을 버릴 수만 있다면 결혼 생활은 즐거움을 주는 소극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작가는 고통스런 결혼 생활이 즐거움 없는 독신 생활보다 낫다는 존슨 식 결론에 도달하는데, 물론 그런 결론은 세상에 순수하고 온전한 만족은 없다는 현실적 각성을 바탕으로 고통과 즐거움의 논리적 연산을 통해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연체」의 의미구조가 얼마간 드러내듯이, 배우자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면 연체료를 무는 한이 있더라도 결혼 생활은 반납되어야 하는 것 역시 건설적인 해결책이 된다.

 

  작가는 결혼을 믿지 않으면서 결혼하려는 결혼 냉소주의를 통해 남녀관계에서 솔직함은 합리적인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 솔직한 것이 최선일까? 낭만적인 정직성으로 위선과 가식이라는 보수적인 새침함을 제거하면, 그때 정말이지 모든 일이 잘 될까? 「그 여자의 침대」로 돌아가 보자. 남자가 도망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가 과거의 낡은 철제 침대를 그리워하며 슈퍼싱글로 만족하기로 한 일은 사실 자기 욕망의 해방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는 불만과 좌절에서 오는 눈물의 깊이 대신 만족과 안심에서 하품하며 흘린 눈물, 즉 피상성을 얻는다. 말하자면 이른바 냉소적 낭만주의는 깊이 대신 천박함을 택한 결과로서의 이기주의와 결함으로써 위장과 위선에 기초한 은밀함은 인간성의 목록에서 삭제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삶에 대한 필수적인 이해를 빼앗기고 만다.

 

  평론가들은 박현욱이 솔직함의 목마를 설계하여 사회적 편견의 성벽을 허물어뜨리려는 오디세우스, 아니면 적어도 여성들의 권리에 관심 있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냉소를 통해 정직함과 진정성이야말로 인간의 불만과 좌절을 종식시킬 유일한 원칙이라고 주장하며 자유를 핑계로 자기의 헤픈 욕망을 유예 없이 충족시키려는 이기주의의 찬동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 욕망의 즉각적인 충족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의 필수조건이라는 카사노바 식 피상성의 철학을 설파하며 솔직함의 미덕을 왜곡하고 있는데, 당연히 솔직함을 따라야 할 때와 은밀함을 따라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성숙함을 필요로 한다. 어쨌든 진정한 삶의 동굴은 오로지 솔직성이라는 주문으로만 열릴 수 있다고 말하는 텍스트만큼 미숙한 것은 없는데,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도 예외는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죄악이라 여기는 것처럼 무구(無垢)한 겸양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합당한 문장으로 번역되지 못한 당신의 욕망과 의사(意思)는 차츰 희미해졌고 종국에는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당신에게는 억압된 욕망을 맘껏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당신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귀히 여기 여기도록 만들어줄 인물 말이다. 몇 권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당신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권했다. 노파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의 의도나 실제 삶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책을 당신 것으로 만드세요. 책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니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이렇게 합시다. 저자는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독서치료사가 억압된 욕망으로 자기 비하에 빠진 당신에게 자아 존중감을 부여하기 위해 저자의 죽음과 포스트모던 독서법을 권유하는 표제작의 한 대목이다. 「위험한 독서」는 실제로 7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결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헤어질 방법을 찾지 못하는 여자가 독서치료사의 도움으로 자기부정의 심리학적인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독서치료사는 제멋대로인 포스트모더니스트보다는 논리적인 정신분석학자에 훨씬 더 가깝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 인간의 욕망은 고정된 양을 가지고 있어서 압력이 증가하면 폭발하므로 어떤 식으로든 솔직하게 표출되어야 한다는 열역학적 관념을 신봉하는 리비도의 경제학자이기 때문이다.

 

  의도는 명백하다. 독서치료사의 정신분석학적 낭만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억압된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할 수 있을 때 죄의식에 의한 자기 연민과 자기모멸은 자기 확신과 자기긍정으로 바뀔 수 있고, 비로소 파괴적인 리비도의 영향력은 최소한으로 줄어들면서 개인적 욕망은 사회적 관계와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경욱의 소설집은 그러한 정신분석학적 사례와 증거들로 넘쳐난다. 예를 들어 자기모멸을 야구선수에 대한 동일시로 극복하는 불운한 천재(「게임의 규칙」), 누추한 현실에 대한 복수심에서 생겨난 남편에 대한 살의를 과거에 대한 추억을 통해 극복하는 아내(「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그리고 자유를 차압당하지만 몽상과 수음과 성인잡지로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을 통과해가는 재수생들(「황홀한 사춘기」)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신경증 치료에서는 전문가처럼 보이지만, 인간학적 이해에서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억압된 욕망의 비뚤어진 분출을 막기 위해 투사 대상에 부착된 동일시의 감정적 해소가 자아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자아의 회복이 곧 사회적 통합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점에서는 틀렸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자들이 하는 일은, 욕망의 왜곡에서 오는 폭력적인 감정들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이후 정상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행위들에 대해서는 어떤 암시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복원되고 긍정된 자기에서 예상되는 것은, 욕망이 투사될 수 있는 대상에서 끌어낸 자아의 높이가 사회적 환경을 넘어가는 자아 숭배의 위험성과 욕망이 좌절된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으며 사회적 파괴를 정당화하는 성난 자아들의 테러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가령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에서 뚜렷하다. 소설은 맥도날드가 상징하는 표준화에 순응하며 매장을 지키던 직원이 우연곡절 끝에 해고를 당하자 직면하게 된 반맥도날드적 의문을 통해 마침내 방화와 폭파의 위협을 포함하는 전단 테러리즘의 저항에 동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얼핏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정확성으로 우리 안의 테리리즘을 예리하게 극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텍스트가 감정이입과 동일시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주인공의 자유주의적 의문이 가리키게 되는 것은 사실상 테러리즘의 정당화이다. 카타르시스 작용이 일어나길 바라며 읽었던 것이 실제로는 자극하는 것이었던 셈인데, 경솔한 작가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잘못된 독서는 아주 막대한 부작용이 수반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간행된 세 권의 창작집에 대한 지금까지의 혹평에서 혹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넘어선다고 착각하는 허영에 찬 자아의 높이만을 보고 코웃음 친다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나의 혹평을 두고 페르소나와 작가를 혼동하는 일은 단순하고 미숙한 독법이 흔히 보여주는 것처럼 예술과 현실의 복잡한 관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라며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이는 자기기만에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예술작품은 제아무리 복잡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술가가 자신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를 잘 꾸며내지 못했을 거라는 체스터튼의 원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소설가들의 솜씨가 거친 비주류의 그것이 아니라 세련된 주류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좀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그것은 식품 첨가물의 위해성이 싸구려 식품에서가 아니라 브랜드 식품에서 훨씬 더 큰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학의 조건이 인생의 조건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물론 최상의 경우 문학의 조건은 잘못된 인생의 조건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영구적이고 불가피한 인생의 조건조차 문학의 조건 안에서 폐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적 허세는 우리에게 커다란 불행이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그런 불행을 행복과 미래로 선전하다니! 이것은 불행이 아니라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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