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곤경

위선의 옹호

택선고집 2008. 10. 24. 17:45

 

위선의 옹호

 

 

                                                                                                                               오양진

 

 

 

   오늘날 우리의 대학 강의실에서 취향이라는 말보다 더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은 달리 없을 듯하다. 이 나라 거의 모든 대학이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다며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유주의 교육학의 주된 실천 형식은 이른바 토론식 수업인데, 이런 수업에서 주어진 문제에 관한 토론이 열띤 논쟁으로 격화되어 여러 주장들이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아주 빈번하게 취향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그 말은 곧바로 놀라운 중재의 능력을 보여준다. 취향이라는 말이 의견 충돌의 상황에 개입할 때 의미하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해석이 다양할 수 있는 만큼 모든 의견은 민주적 관용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취향이라는 단어의 그러한 현대적 용법은 편견과 선입관을 교정하려는 데카르트적 회의주의와 연계될 가능성보다는 더 좋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없다는 극단적 회의론자의 상대주의와 관계될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는 진리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고된 사유의 길보다 진리의 상대성이 허락하는 가벼운 언어유희가 훨씬 더 매력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향의 상대주의로 인해 뜨겁게 달구어진 대학의 토론문화를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하에 껴안아야 하는 것은 특히 진리 탐구의 가치를 유념하는 몇몇 교사들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책무가 되었다. 만약 진리 탐구와 관련하여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별하려는 진지한 교사로 남으려면, 그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모든 의견이 동등하다는 민주적 가정을 부당하게 훼손하는 차별적인 권위주의자로 비치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사려 깊은 교사라면, 말의 사용이 아닌 말의 폐기에서 동일한 문화의 방향을 감지할 수도 있다. 가령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의 未亡人이라는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을 소름끼치게 하는 말인데, 현재 고인이 된 남편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녀들에게 그 단어는 과거의 야만적인 순장 풍습을 반영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말로 간주된다. 사실 자유주의적 성향의 언론인과 학자들을 포함한 대다수 남성 지식인들 또한 같은 이유를 들어 미망인이라는 용어의 폐기론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몇 가지 이유들을 더 추가하기도 한다. 남편이 죽은 부인에 상응하는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는 그런 의미로 붙이는 말이 없다는 것도 그 이유들 중에 하나다. 그렇다면 해녀 내지 비바리와 같은 말도 없애야 하는 것일까? 남녀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덕목에 대한 존경심을 지닌 현대사회라고 하더라도, 그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하나의 말은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오래된 의미를 덜어내거나 새로운 내포를 덧붙이면서 그 외연이 변화되게 마련이고, 나아가 폐기의 운명을 맞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 지닌 의미의 변화나 용어 그 자체의 폐기에서 오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변화의 당위에 압도됨으로써 그 말에 포함된 참된 미덕과 보편적 가치마저 함께 쓸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내버리는 꼴인데, 미망인이라는 용어는 이 말의 어원학적 출처라고 알려진 중국 역사서 『춘추좌씨전』의 최초 용례를 보면 돌아가신 문왕 부인이 초나라 재상 자원의 유혹에 직면해 스스로를 낮춰 부르며 남편에 대한 애틋함까지는 아닐지라도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그 용례에서 개인적 욕망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유예하는 자기억제의 미덕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의견들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의견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항생제가 몸에 해로운 약이라고 해서 항생제의 약리학적 이점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미망인이라는 용어에서 편견과 차별의 기초를 적발하는 지식인이나 미덕에 대한 칭송의 의미로 그 용어를 존칭화한 일에서 남성들의 문화적 위선을 색출하려는 페미니스트에게 그 용어를 폐기하자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즉 그것은 대중적 이기주의를 보편적 가치의 상속에서 오는 도덕적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이고, 심지어는 권리장전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주장이 지니는 시장가치도 작지 않은데, 말하자면 폐기론자는 우리 사회 대중들의 천박한 쾌락주의에 아첨함으로써 그들의 매체 영웅과 경쟁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대중들의 쾌락주의는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필터를 통해 오래된 것이지만 보편적인 미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걸러버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즉각적인 충족에 맡겨진 욕망이라는 그들의 소망적인 사고를 실현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라디오에서 듣게 된 가요의 가사 몇 줄은 그런 대중적 쾌락주의의 수상한 면모를 아주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있었다. “남원골의 춘향이가 이몽룡을 차버리고 대학로에서 싱글을 선언했어/ 세상의 사내들은 모두 다 내 곁에 오라 나도 맘에 드는 사내를 골라보자/ 청바지에 노란색 머리 열녀문도 헐어버린 압구정 춘향이가 외치는 한 마디는/ ······ / 오 일편단심 일편단심 이제 필요 없어 오 일편단심 일편단심 그건 남자들의 욕심/ 오 일편단심 일편단심 이제 사라졌어 춘향이 눈썹 넘어 광한루를 넘어” 그리고 얼마 뒤 나는 국내의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어느 시인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되고 있었다.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문혜진의 「질 나쁜 연애」중에서

 

   한쪽은 약간 직설적이고 다른 한쪽은 다소 비유적이라는 세련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정열은 그 치명적인 결과와 상관없이 억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렇다면 불량한 것과 양호한 것에 대한 판별력의 발휘를 차별적인 권위의 행사로 오인하게 만들었던 통제될 수 없는 개인적 정열에 대한 찬미는 당연한 것이지만 저급한 장르와 고급한 장르를 구분하던 문화적 경계마저 소멸시키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요사이 우리 소설들은 지적인 얼리 어댑터들을 주축으로 세계에 대한 민주적 각성이라는 그럴 듯한 이념적 포장을 통해 사회 진보에 필수적인 프로이트적 문명의 불만을 모두 즉각적으로 해소되어야 할 억압과 착취의 현상으로 가정하는데, 이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작가들은 자유주의 지식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관습성으로부터의 일탈이나 불온함에 대한 애호는 해방과 자유의 미학적 전개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소설적 독창성과 탁월함의 가시적인 징표로 상찬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귀한 야만이라는 수사에 기대어 경계 없는 삶과 비관습성을 예술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하는 데서 심화되기 마련인 문화의 노골화라는 문제를 상기하게 된다. 가령 최근에 내가 읽은 심윤경의 연작소설집 『서라벌 사람들』(실천문학사, 2008)은 미학적 파격에 대한 환호가 동반하는 그러한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물론 작가의 노골적 상상력의 바디라인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예스런 문장들의 절제된 구사에서 오는 고대적 신비의 베일을 한 꺼풀 벗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그녀를 절제의 지지자로 오해하는 일은 아주 잠깐이면 된다고 할 수 있다.

 

   심윤경은 자신의 연작소설집을 통해 집요하게 천오백년 전의 신라를 性을 숭배하는 종류의 聖이 지배하던 화끈한 토착종교의 나라 神國으로 형상화하는데, 실제로 지체 높은 귀족 여인들과 동성애의 유희를 만끽하는 연제태후와 혼인을 앞두고 선배 화랑과 남색의 환락을 즐기는 후배 화랑 준랑, 그리고 성대한 교합제 이후 숲속에서 뜨거운 신음으로 집단 야합을 벌이는 신라의 장삼이사들이 등장한다. 작가가 후기에 덧붙인 흥겹고 섹시한 신라인들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운운하는 대목과 마주치기 전이라도, 독자들이 과거의 신화적인 윤색이 가리키는 의도를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절대적인 성적 자유를 지금 여기에서 고무하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후기의 작가가 박물관의 실제 유물까지 거론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경건한 심정”을 운위할 때, 그것은 서투른 과장이 아니라면 뻔뻔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라면, 가령 「연제태후」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신라적인 삶을 생생히 재현하는 다큐멘터리란 말인가?

 

   선제와 태후는 각자 첩실이나 사사로운 신하를 두지 않고 오로지 배우자의 품 안에서만 기쁨을 누렸으니 이는 서로에게 걸맞은 거구의 짝을 다시 구할 수 없음이었다. 지증황제와 연제황후의 교합례는 그 영험한 생명력이나 징그러움에서 전후대에 견줄 예가 없이 출중했다. 법흥제도 물론 태자의 신분으로 제단 아래에 꿇어 엎드려 제와 후의 교합을 지켜보았다. 지증제가 등극했을 때 이미 제의 연치는 예순넷이었다. 천제를 주관하는 제관들은 제의 나이가 많으니 교합례가 시원찮을까 우려하고 태자인 법흥이 대신 교합례를 주관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제와 후는 허허 웃으며 제관들의 우려를 일축했다.

 

   엄숙한 고어 투와 신화적인 후광으로 파격적인 흥분의 어리석음을 감추려고 하지만, 이보다 더 노골적이고 무감각한 문장들이 있을 수는 없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이다. 물론 심윤경의 낭만적 유토피아주의에 관한 우리의 혹평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이 현실적 흥분과 구분되는 이른바 미학적 흥분일 뿐이므로 둔감한 독자가 아닌 이상 상징적인 의미를 놓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혜성가」의 신궁과 안흥사의 대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 조건의 불교적 이해방식에 대한 고려는 최소한 민감한 독자라면 현실적 흥분이 미학적 긴장감의 구성 요소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흥분은 전염력이 아주 높고 미학은 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쉽게 전환된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미학적 흥분은 개연성 없는 공상을 현실화하려는 무모한 열정의 최음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가 하면 사실상의 비평적 칭찬인 미학적 긴장감이라는 표현은 종교적인 장식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과 문명화의 이해라는 차원에서 제멋대로이고 미숙한 소설들에 예술적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성적 방종을 정당화하려는 지적 속물주의이거나 도덕률 폐기론과 같은 일종의 지적 몽매주의일 수밖에 없다.

 

   결국 도덕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성적 야만이 고귀한 현존으로 등극했던 과거 역사의 소위 낭만적 신화화는 금지를 금지하고자 하는 현재적 이데올로기의 퇴보적 투영을 통해 인간주의와 문명화는 억제라는 필요조건과 미덕이라는 충분조건으로 해서만 성립한다는 엘리아스 식 사회학의 지혜를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위선의 가리개에 불과한 것으로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작가 심윤경은 우리 삶에서 「천관사」에 나오는 “대의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개인의 인생이 소리 없이 으스러져가는 비극”을 돌려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인생을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고, 또 참된 인간관계를 경계 없는 욕망이라는 피상적 공통분모로 환원하는 것은 사회적 결과의 측면에서 안흥사 주지 스님 융천사의 말처럼 인간을 야생의 금수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만들게 된다. 성적 금기의 파괴를 통해서만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 있다는 관념은 명백히 경솔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그릇된 열정과 올바른 열정을 식별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그들의 무지도 한몫 했겠지만, 아마도 지적 엘리트들이 식별에 기초한 감식안을 권위에 바탕한 차별적 권력으로 선전하며 그것에 문화적 위선이라는 낙인을 찍은 뒤부터가 아닐까? 작가들 또한 그런 엘리트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이념적 뚜쟁이 질을 해왔는데, 이것은 위선적인 문화를 부정하기 위해 낭만적 위악을 창안해낸 일이 가리키는 그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악의 사회적 경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악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또 하나의 위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위선이 또 다른 위선으로 대체된 셈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올바른 위선과 그릇된 위선을 구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위선과 나쁜 위선을 구분하는 일의 중요성은 작가들의 위악 그 자체에 대한 애호와 위선에 대한 집요한 비평 때문에 거의 유실되었다. 다음은 이것의 가장 끔찍한 예들 중 하나이다.

 

   “으, 으, 음끄끄······”

  통닭 반마리를 거의 다 씹어 삼킨 시어머니가 조금 전과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중략···)

   “쇼팽의 피아노곡은 밥을 먹으며 듣기엔 너무 예민한 곡이야.”

  며느리는 전축 앞에 서서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 식탁 앞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중략···)

   “어머니, 옛날에, 페르시아에서 말이죠. 어떤 왕의 어머니가 며느리를 무척 미워했다죠? 왕의 어머니는 닭을 반으로 잘라 반쪽은 제가 먹고, 나머지 반쪽은 며느리에게 먹였답니다. 닭을 먹고 며느리는 죽었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느냐고요? 그건 말이죠······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요. 칼날의 한쪽 면에만 독을 발랐거든요. 이제 아시겠어요?”

   (···중략···)

   “어머니, 원래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고통을 주는 법이랍니다. 어머니는 달걀보다 닭을 좋아하셨죠. 그러나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달걀만큼 독을 타기 힘든 음식도 없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말을 하면서 쌀밥 위에 얹은 달걀프라이를 떠올렸다. 반쯤 익어 젓가락으로 건드리면 톡 터질 듯한 달걀노른자를 생각하자 입 안에 침이 돌았다.

 

   오현종의 소설집 『사과의 맛』(문학동네, 2008)에 실려 있는 「닭과 달걀」이라는 단편의 거의 마지막 장면인데, (내가 몇 년 전에 읽었던 표명희의 「실리카겔」이라는 단편보다 훨씬 더한) 이 장면이 재현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잔인한 독살은 읽어보면 금방 알게 되지만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 하에 부당한 고통을 강요하는 가족이라는 위선적 굴레에 대한 통렬한 자유주의 비평을 의미한다. 실제로 작가 오현종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전적 동화들을 패러디하는 반동화적 상상력으로써 시종일관 자신의 소설들을 개인적 자유의 선양이라는 잘못된 위선을 지지하기 위한 다양한 위악적 변이들로 채우고 있다.

 

   가령 「상추, 라푼젤」에는 사랑은 굽이치는 것이며 가족이라는 장애물이 높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라고 말하며 사위의 성적 일탈을 미리 승인하는 파렴치한 장모가 나오는가 하면, 「헨젤과 그레텔의 집」에는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위선적 편견을 버리라고 말하면서 생계유지의 의무라는 고통만을 부과하는 가족 구성원들을 집에서 차례로 내쫓거나 유기하려는 패륜적인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파렴치와 패륜의 그런 위악적 시도들은 풍자적 논평을 구축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말할 것도 없이 이 논평들에서 핵심적인 표적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족이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녀는 가족을 정열의 위선적 장애물이나 구태의연한 편견, 혹은 물거품처럼 허망한 것으로 그려낸다. 물론 오현종의 패러디에서 서사적 의도가 그와 같이 明若觀火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작가는 해석학적 다원주의라는 미학적 베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감싸서, 독자들에게 그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감자가 아니라 실은 사과이다. 소설집의 표제로 선택된 ‘사과의 맛’을 설명하기 위해 후기의 작가는 “그 맛은 사과와 먹는 사람 간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는 버클리 주교의 말을 인용하는데, 이 말은 독이 든 사과를 내미는 자의 치명적인 의도를 숨긴 채 독자의 해석학적 자의성을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한다. 물체를 관념이라 치부한 버클리를 발차기로 혹평했던 존슨 박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풍자적 논평의 방향을 지닌 패러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은 독자들의 해석과 무관한 자리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방향과 의미가 동의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해석은 작품에서 한 방향으로 깊어지는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지 작품에다 그 바깥의 독자들이 제멋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작가 오현종은 가족의 현상학을 통해 위선적인 토대에서 부침하는 가족의 참된 실상을 보여주려는 착실한 관찰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족의 신화에 대한 비평을 통해 개인적 자유와 반사회적 시도들의 정당성을 말하려는 불온한 선동가에 가깝다.

 

   위선의 진실을 발견했다는 핑계로 사회적 한계 위에 개인적 자유를 얹으려는 선동가의 말을 따른다면, 이 사회는 한 마디로 “개판”(「헨젤과 그레텔의 집」)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재우고 밤중에 은밀히 포르노를 즐기던 부부가 느닷없이 깨어나 이 장면을 목격한 아이에게 위선적인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포르노그래피가 어떤 것인지를 차분히 설명해주려 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 분명 위선은 악덕일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악덕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명백한 것이다. 성 생활이 단순한 생물학적 기능을 넘어서 인간적 문화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의례적 베일로 가려져야 한다는 명령은, 천사 같이 말하고 인간 같이 사는 도덕주의자들의 위선적 행태라는 새뮤얼 존슨의 말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지혜라는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문학적 불온성의 시조가 되는 李箱조차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것이라고 올바르게 말했다. 다시 말해 인생이 비밀 없이 투명해야 한다는 생각만큼 그악스럽고 비인간적인 견해는 없는데, 이것을 알려면 그 반대편에서 씌어진 것을 읽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때 그는 자신이 미시즈 서에게 한 얘기들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절실한 욕망보다 사랑하는 여인의 궁극적 행복을 앞세웠다. 그러나 뒤에 냉정한 마음으로 살폈을 때, 그는 자신의 단념이 순수한 자기희생이 아니었음을, 그녀와 혼담이 있던 사내에 대한 열등감이 거기 섞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의 자신감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달리 행동했을 터였다. 그 생각이 줄곧 그를 괴롭혔다.

   연인을 위한 자기희생은 건강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자기희생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자기희생에 따르는 슬픔도 건강했다. 슬픔은 의식을 지닌 생명체들이 상실의 충격에 대응하는 길이었다. 잃을 수 없는 것들을 잃었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길이었다. 슬픔을 통해서 사람은 상실과 화해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자연히, 연인을 위해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상처는 깨끗이 나았다.

   열등감에서 나온 상처는 달랐다. 열등감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 감정이었다. 그것은 자기보다 나은 상대와 겨루어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지녔다. 그의 열등감은 연인의 행복을 위해서 절실한 사랑을 포기하도록 그를 설득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강한 연적과 겨루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에서 나온 상처는 깨끗이 아물지 않았고 동상에 걸린 살처럼 생각날 때마다 가려워지는 검붉은 부위를 그의 마음에 남겼다.

 

   이 대목은 내가 최근에 읽은 또 다른 SF 창작집 복거일의 『애틋함의 로마』(문학과지성사, 2008)에 묶여 있는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라는 단편에서 인용한 것인데, 사랑했으면서도 그 사랑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던 주인공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사랑의 부음을 듣고 과거에 생각했던 건강한 자기희생이 비겁한 열등감의 위선적인 은폐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냉정하게 숙고하며 애틋한 회한을 피력하고 있는 장면이다. 작가의 내면과 인물의 내면이 겹쳐진 형태이긴 하지만, 비록 위선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절실한 욕망을 희생하고 상실의 슬픔을 겸허히 수용한 삶이 보여주는 품위 있는 내면은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진실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사람살이의 심리학적 풍요로움과 깊이가 우리의 위선이 사랑의 비밀을 지킨 대가로 얻은 인간학적 은총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서사적 사례는, 특히 한국문학의 현재적 흐름에서는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 복거일의 이번 작품들에서는 흔하게 발견된다. 가령 표제작 인 「애틋함의 로마」에는 사랑의 좌절을 되풀이 경험하면서도 질투의 불길 대신 노래의 물길을 따르며 우주적 방랑을 택한 미래의 음유시인이 나오고, 「기적의 해」에는 영생이라는 생명의 비밀이 풀렸음에도 그 혜택에서 제외된 채 병들어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얄궂은 운명의 비밀에는 속수무책인 안타까운 주인공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미래적 가상들을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에 골몰하는 카사노바 식 인생의 자유주의적 피상성 대신 자기억제를 통해 욕망에 한계를 부여하고 그것을 유예함으로써 영혼을 드높이는 단테적 인생의 금욕주의적 깊이로 채운다.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오도적인 현재의 관심에서 살아 있는 과거의 보편적 감각마저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와 초월의 가능성을 간직한 과거에 대한 관심에서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의 현실까지 보정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복거일 식 애틋함이 기원하는 상상력의 발원지이다. 애틋함의 상상력이라 할 만하다. 복거일의 말을 약간 각색하자면, 그처럼 모든 문학의 발길은 애틋함의 로마로 통해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의 또 다른 단편인 「서울, 2029년 겨울」에 나오는 말처럼, “세월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변화만큼이나 보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나의 이념으로서조차 간직한 이들이 드문 것 같다. 위선적 제도라는 이유에서 (다소 유연하게는 가족 변형을 인정하며) 가족 붕괴를 조장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번창을 보면, 또 그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만연을 보면, 쾌락주의적 자유보다 더 빛나는 금욕주의적 굴레가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이 사회에서 거의 완전히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위악적인 문학의 선정적 매력보다는 차라리 위선적인 문학의 진부한 성실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는 차라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위선을 옹호한다. 이것이 보수적인 생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반동적인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위선의 파괴가 자유의 증대가 아니라 성범죄의 증폭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라. 문명의 질서보다 자기만족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여, 그런 위악의 결과를 거울삼아 그만 소설책을 내려놓고 위선을 희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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