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이데올로기
오양진
나는 근래에 우리 대학의 문학 연구자들이 염상섭의 작품과 그 시대의 탐정소설과 같은 대중적 제작물들 사이에 질적인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차이는 사실 문학작품의 질이 아니라 이른바 사회역사적 구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인데, 그 결과 과거에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었을 대중적인 문화가 이제는 고급문화와 동등한 것이자 심지어 더 나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교육의 담당자들은 권위와 위계를 구축하는 모든 지적이고 도덕적인 장벽을 제거한 교실을 창출하는 것을 거의 의무사항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가령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독려함으로써 자발적인 학습을 장려하는 전통적인 교육은 복잡한 사상 대신 단편적인 정보의 수용만을 고무하며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소위 ‘피피티 문화’로 대체된 지 이미 오래이다. 대학의 교육자들은 결국 학생들이 습득해야 할 지식을 만들어내는 일과 지식의 습득에 불편함이 없도록 고객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로 이래저래 다른 이들의 연민을 자아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피교육자들의 불만제로에 도전하게 된 교육자들의 한심한 처지는 사실상 자기원인적인 것이다. 차이 그 자체는 단지 구별 가능한 인지적 특징일 뿐 더 나쁜 것이나 더 나은 것이란 없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편견 없는 민주적 선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요사이 번성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육자들 대다수는 그러한 자유주의적 신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지식인 교육자들이 당면한 문제는, 다른 많은 현대적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에 의해 제조되어 유포된 이념들이 외부로 흘러나가 사회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마침내 그 자신들까지도 그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된 아이러니로부터 온다. 실제로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 상호작용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게 된 자유주의적 이념은 세상에 대한 상대주의적 각성과 결합되어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를테면 세련됨과 조잡함, 미묘함과 단순함, 매력과 상스러움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교육의 근간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다. 과장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간의 차별조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물론 이것은 편견에 의한 차별이 존재한 적이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가치들보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지지하여 그 우열을 식별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모든 가치들은 그저 다른 것일 뿐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며 ‘차이를 존중하려는 자유주의 이념’은 사회적 정의 못지않은 문화적 해악을 불러오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의견이나 공적인 일치로 이끌어가는 보편적 차별에 찬성하는 최소한의 편견마저 거부함으로써 세련된 문명의 관점에서 천박성을 비판할 수 있는 토대를 함께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무엇이든지 무의미하게 만든다. 여기서는 일단 비난 받을 만한 사람이 자유주의 지식인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그들은 아마도 좀 더 나은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세계에 대한 각성에 경쟁적으로 매달리며 항상 사고의 전환만을 선호했을 뿐만 아니라, 계몽적 환희를 통해 은폐된, 명성과 같은 자신들의 이념적 개발 이익이 그 이념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결과들보다 더욱 중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지식인들에 의해 자라난 자유주의 이념이, 다니엘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일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다양한 변종 이데올로기를 낳았던 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지난 1990년대에 적어도 그 경제학적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사망한 일과 함께, 개인적 차원에서 온갖 불만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생겨났다. 물론 지식인들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을 합당한 요구들을 취급하는 민주적 개혁들과 이음새 없이 깔끔하게 결합시켰는데, 예를 들어 페미니즘은 모든 인간의 문제를 가부장제의 표현으로, 파시즘 반대론은 그것을 온갖 전체주의적 시도의 결과로, 그리고 다문화주의는 그것을 모든 종류의 인종주의적 편견의 소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데올로기적 요구들은 특별히 인간 심리학의 한 가지 사실을 조명하게 되는데, 불평은 항시 그 원인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본질적으로 강력한 보상을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차원의 제약을 제거함으로써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좀 더 쉽고 좀 더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사고는 단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불만의 합법성을 설득하는 가운데 삶의 곤경들, 특히 저마다가 처하게 되는 곤경들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는 이념에 대한 필요성은 항구적으로 솟아난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개인적 문제들에 따라 여러 층위의 차별적 제약을 부정하는 다양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들에 끌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차이의 긍정을 통해 정당화된 자아 안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쫓아버리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점점 구별하지 않으려는 차이 존중의 문화 안에서, 결국 모든 자기표현은 자기반성이 아니라 자기기만을 통한 방종, 나아가 진정한 이해에 대한 반대에 방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우리의 시인들도 최근 몇 년 동안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급진화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이라는 점잖은 장막 뒤에 숨어 자아의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자신의 명백한 특성으로 간주하며 자아표현에 대한 온갖 도덕적 제약을 소거시키는 데 동참해왔다. 최근 간행된 김언과 신해욱의 시집도 예외는 아니다. 먼저 다소 온건한 쪽부터 살펴보자.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축, 생일」 전문
신해욱의 시집 『생물성』(문학과지성사, 2009)의 서시이다. 생일을 맞은 ‘나’는 어색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이목구비’로 제유되는 ‘나’의 정체성은 생일 이외의 시간에는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재규정되면서 ‘제멋대로’ 존재하지만 생물성의 기원이 되는 날에는 ‘나’의 모든 정체성들이 ‘정돈’되어 윤곽을 드러내는데, ‘나’는 이 불일치로 인해 어색함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생물성과 사회성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에서 오는 ‘어색한 시간’에 대한 사유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사유는 일인칭에 관여하는 성질이 다른 종류의 정체성들을 반성해 보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끝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 미용실에서 머리를 맡길 때(「금자의 미용실」)나 소설을 읽을 때(「호밀밭의 파수꾼」), 또는 친구를 떠올릴 때(「보고 싶은 친구에게」) “나는 180도로/ 다른 얼굴이”(「굿모닝」) 된다. 심지어 헨젤과 천사와 체조 선수, 심지어는 숫자나 인어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마침내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왜 나는 나로/ ······/ 환원될 수 없는 것일까.”(「레일로드」)
일단 우리는 복수의 자아로 분열된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고민을 읽게 된다. 여기서 누군가는 당연하게도 그러한 정체성의 시학이 이상의 모더니즘 이후로 진부한 것이 되지 않았느냐는 점에 대해 논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해욱의 시는 복수의 자아가 파국이 아닌 상승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시선의 전환을 꾀하는데, 사실상 그녀의 시들에서 정체성의 시학은 탈정체성의 정치학으로 슬쩍 모습을 바꾼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환원’이라는 단어의 사용에서 암시되는데, 자신의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담은 그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적 생경함에서 오는 부정적 뉘앙스로 인해 복수성을 승인하지 않고 배제하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환원’이라는 말에는 개별적 자아를 ‘식민지’(「벨」)로 만드는 모든 정치적 압력에 작동하는 전체주의적 언어에 대한 시인의 두려움이 배어 있다. 결국 시인의 정체성이 왜 그렇게 “예측 불허의/ 이야기”(「나의 길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자명한 셈인데, 이제 시인은 ‘열거’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화이트」)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질서 정연한 행진이었다.
한 사람이 한 줄씩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행진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앞뒤가 있었다.
머리를 세게 흔들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한 사람이 아닌가.
―「줄 속에서」 부분
신해욱의 시들을 관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체성에 대한 요구가 배제의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라는 정치적 고찰이며, 복수의 자아에 대한 포용은 모든 사람을 배제 없이 승인하는 공평한 삶을 구성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러나 복수의 자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요구는 정직하지 못한 자기연민의 완곡어법으로 그녀의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굿모닝」)라는 결심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단일한 자아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일시적인 자아들과 결합되어 많은 ‘이름’(「방명록」)을 갖게 되더라도 그게 뭐든 그 자아들에 ‘사실’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뺄셈에 약하다”(「따로 또 같이」)는 자기 특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배제의 정치학에 대한 거부감을 슬쩍 끼워놓고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삶에서 자기정당화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빼버리려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모든 자아의 순간들에서 ‘은총’과 ‘키스’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인데, 여기서 ‘소수점 이하의 1인칭들’(이광호)에 대한 존중이 의도하는 것은 명백하다. 책임의 개념을 수반하기 마련인 정체성의 반대편에서 “수소를 채운 것처럼”(「지구의 끝」) 가벼워지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에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충분히 좋은 일”(「눈 이야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탈정체성의 정치학이 수반하는 포용의 윤리는 차이에 상대성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개별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나타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어쩌면 현대인들이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의 존재 좌표를 상실하게 된 도시 환경에 대해 일정하게 응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아의 순간적 변덕을 차이의 의제로 승인하려는 노력은 원자화된 개인들을 추켜세움으로써 존재감의 회복을 목표로 한 공동체의 구축이라는 좀 더 중대한 문제는 회피한다. 누군가는 한 사람의 시인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지적할 것이지만, 공적인 삶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사적인 삶이란 없다는 조지 엘리엇의 말은 어느 때라도 상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신해욱이 보여주는 탈정체성의 관념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변화무쌍한 자아의 순간들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된다면, 모든 종류의 경험은 시시한 것으로 전락하게 되고 취향의 세련은 요원한 것이 되며 천박성에 대한 판단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차이의 상대화는 모든 자아로 하여금 더 높은 수준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지 않음으로써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전망과 사상의 발전을 차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에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충분히 나쁜 일이다. 충분히 나쁜 일은 또 있다.
내가 덥다고 말하자 그는 문을 열었다.
내가 춥다고 말하자 그는 문을 꼭꼭 닫았다.
내가 감옥이라고 말하자 그는 꼼짝 말고 서 있었다.
2 더하기 2는 네 명이었다. 남아도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내가 유죄라고 말하자 그는 포승줄에 묶였고
내가 해방이라고 말하자 그는 머리띠를 묶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꼼짝 말고 서 있었다. 버스 안에서
이제 그만 내릴 때라고 말하자 그는 두 발을 땅에서 떼었다.
내가 명령이라고 말하자 그는 망령처럼 일어서서 나갔다. 누군가의 입에서
―「감옥」 전문
김언의 시집 『소설을 쓰자』(민음사, 2009)의 맨 앞에 나오는 시인데, ‘말’이 행위를 규정하는 세상은 ‘명령’이 모든 종류의 행동에 대한 제약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감옥’을 만들게 된다는 주장을 ‘명령’을 ‘망령’으로 뒤집는 언어유희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언어는 사실의 진술과도 관련되고 가치의 진술과도 관련된다는 점에서 당연히 해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당위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 언어에 대한 정통적 가설이다. 그러나 그 체계는 감옥의 공간을 이룩하기도 하지만, 통상 도덕의 공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언어가 망령된 것이라는 시적 환상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 그는 무엇보다도 수학적 조작과의 유비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더하기 2는 네 명’이 되는 수학적 설계를 실현하려면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논리적 조작에서 다루기 어려운 부분을 잘라내야 하는 것처럼 ‘남아도는 것’으로 표상된 언어적 쓰레기에 대한 배제 없이는 언어적 질서가 성립할 수 없는데, 이처럼 언어의 체계는 언어적 혼돈이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필요를 억압하는 부당한 처신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덕적 편견과 결합된 언어적 억압의 문제는 김언의 시 전체를 통해 아주 집요하게 다루어진다.
예컨대 “소리를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요가 뒤엉켜서 누워 있을지 상상”(「돋보기」)하며 ‘소요를 준비하는 조용한 군중들’(「한 사람들」)이라는 혁명의 이미지로 억압된 언어들의 분노를 상기시키는가 하면, ‘꽃들을 다 그리고도 남는 꽃들’이나 ‘애벌레가 기어오르다가 슬몃 흘리고 간 애벌레’(「흔들」) 등 언어적 잉여에 시선을 던짐으로써 어떤 존재의 “확인되지 않은”(「미확인 물체」) 순간들을 포착하기도 한다. 또 정체성의 분열과 증식을 통해 자아의 동일성에다가 모호성을 부여하는가 하면(「숨바꼭질」), 바닷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맞춤법을 모르는 소년’(「먼지 행성의 주민들」)은 “모든 언어는 은어니까”(「톰의 혼령들과 하품하는 친구들」)라는 전환적인 명제로 구조하기도 한다. 결국 시적 언어란 그러한 언어적 ‘거품’(「문학의 열네 가지 즐거움」)을 제거하지 않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시인의 의도는 여기서 분명한데, 바로 단순한 ‘언어’의 세계에 구속된 복잡한 ‘사실’의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이 시인의 애호는 표현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한 김춘수 식의 시적 갈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현재의 시인은 진실을 사실의 하나로 끌어내리려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이지 사실을 진실로 끌어올리려는 형이상학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의 시에서 더 잘 드러난다.
쥐는 싫어하지만 고양이는 귀여워한다.
고양이는 귀여워하지만 덩치 큰 개는 무서워한다.
덩치 큰 개는 무서워하지만 악어는 집에서 기른다.
악어는 애완동물이지만 악어새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진딧물은 개미와 공생 관계이지만
개미는 다른 개미를 노예로 부린다.
사람은 동족을 잡아먹지만 종교에 따라
개 돼지 소는 먹지 않는다.
19세기의 프랑스를 좋아하지만
파리는 못 가 봤고
달팽이 요리는 못 먹어 봤지만
브리지트 바르도의 텅 빈 머리는 즐겨 씹는다.
말은 싫어하지만 때에 따라서 아주 맛있는 고기다.
전위는 새롭지만 선호하는 부위가 다르다.
―「취향의 문제」 전문
김언 시인이 ‘취향의 문제’에서 제기한 것은 한마디로 좋은 삶에 대한 다문화주의적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쥐는 싫어하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달팽이 요리’를 이상하게 여기고 개고기를 “즐겨 씹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개고기에 대해 문화적 편견을 종종 드러냈던 서양의 한 여배우를 비판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인데, 하지만 취향의 포용에 대한 그러한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처한 논리적 자기붕괴를 따라가게 된다. 왜냐하면 취향들의 다문화주의적 포용 안에서는 개고기에 대한 선호와 개고기에 대한 혐오 모두 문화적 정당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비판의 근거가 허물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다문화주의자의 궁핍한 상상력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견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정당화의 열기를 부채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나는 나의 유일함인데,”(「연루된 사람들」) “그들이 고민하는 시와 내가 고민하는 시가 왜 다른 무대에 살면 안 될까요?”(「인터뷰」) 하고 질문하면서, 시인은 자신만은 “당신과 다르다는 걸로 만족한다”(「당신은」)며 슬몃 관용의 포즈를 취한다. 과연 그가 그걸로 만족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시인이 언어적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다문화주의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면 시를 썼을 리 없다. 그는 ‘다른 무대’에 살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대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표준 문법에 시비를 걸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인데, 결국 나는 그 독창적 차이에 대한 열망에서 권력에 대한 깊은 욕망을 감지하게 된다. 어쨌든 김언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소통 가능한 언어에 대한 요구란 다양성을 배제하는 일종의 정치적 억압과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이며, 복잡한 사실에 대한 승인만이 모든 가치를 억압 없이 인정하는 다문화주의적 자유를 허락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미학의 분야에서 키치가 성공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차이에 대한 무분별한 승인과 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시학을 차이의 정치학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불안정하고 방어적이 되기 쉬운 일종의 자기합리화의 경향을 통해 예술적 기준에 대한 의도적 무시를 정당화하고 마침내 미학적 야만주의의 번성을 가져올 것이다. 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 적이 있는가!
여기서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는, 예술이 악의 있는 행동들을 자극하는 뜻밖의 사회적 결과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독단을 반성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도그마를 지지하는 경우 선의가 결과를 은폐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폐해는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이 된다. 선의가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순간 엄청난 사태를 몰고 올 터무니없는 시도들이 실제로 예술적 선의를 내세워 미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고 사회를 보호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사회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미적 근대성의 이념까지 가세하면, 그것은 마치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셈이 되고 만다. 사실 이데올로기적 독단들 가운데 부차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회의주의의 먹이가 되어도 좋지만, 가장 기초적인 도그마들마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텅 빈 머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데올로기적 도그마들이 다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의 종이 되기 위해 낡은 도그마를 거부한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종종 말하는 문학의 탈이데올로기화는 문학의 재이데올로기화가 되기 십상인데, 말하자면 빈약한 이데올로기가 풍부한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꼴이다.
물론 결과는 나쁠지 모르지만 의도가 좋은 시집에 대해 관대한 평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시적 폐해를 관용으로 대한다면, 시적 은혜는 도대체 무엇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내가 다소 가혹했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