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곤경

사이코패스의 소설

택선고집 2010. 1. 14. 16:28

사이코패스의 소설

오양진

 

근대의 범죄학자들이 범죄에 대해 제공하는 설명의 롬브로소적인 형식은 곧바로 결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범죄성은 이[齒]나 귀[耳]와 같은 타고난 용모에 각인되어 있다는 생물학적 설명의 그러한 형식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해명되기도 전에 이미 다양한 경험적 관찰들로 쉽게 그 결점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천치와도 같은 무심함을 보여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함으로써 범죄자는 특이한 용모를 갖게 마련이라는 근대의 범죄학적 가정에 대한 강력한 반증 하나를 보태었다. 그리고 수십 년 뒤에 스탠리 밀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이 권위를 갖는다고 가정된 인물에 복종함으로써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을 전기로 죽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끔찍한 실험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는 최근에야 비로소 사람 좋아 보이는 강호순과 같은 살인자들을 통해 그러한 용모와 범죄의 무관함을 실질적으로 확인하였다.

 

모든 인간은 죄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으로서의 원죄를 지닌다는 오래된 종교적 확신이 오히려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위 이웃집 살인마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의 전모가 밝혀지는 과정은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희생자에 대한 증오와 세상을 없애고 싶다는 열망이 살인의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짐작컨대) 특별한 의도 없이 희생자와 세상에 가해진 해악은 자유의지로 구조화된 자기 규제의 원리에 기초해 책임을 묻는 근대적 법률의 구속력을 슬쩍 벗어난다. 말하자면 도덕적 의미를 구성하는 의도가 부재함으로써 범죄적 성격이 약화되는 것이고, 결국 동기나 의도 없는 범죄자들은 근대적 관용의 문화 안에서 범죄자가 아니라 이른바 사이코패스(psychopath)로 간주되어 법적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심리 치료의 대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사이코패스의 공식적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기 없는 살인이 정말 존재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이제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범죄의 구실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근래 나는 언론을 통해 성범죄자들이 관대한 처벌을 받아내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뻔뻔스럽게 강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대학 인텔리겐치아로부터 흘러나온 이념들이 그러한 행태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인데, 예컨대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자유주의적 인권 옹호론자들은 사회적 환경이 범죄자들의 마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연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범죄 그 자체보다는 범죄를 둘러싼 불만스러운 환경을 부각시킴으로써 범죄자에게 핑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는 생물학적 범죄 이론가들은 진화 생물학을 범죄 행위에 적용하며 롬브로소의 용모 대신 도킨슨의 유전자에 범죄성의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과거와는 다르게 범죄자들의 변명에 과학적 토대까지 선물하고 있다.

 

자기충족적인 유희를 위한 범죄라고 할지라도 어떤 범죄자에게 최소한의 동기나 의도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원한의 동기가 아니라면 적어도 쾌락의 동기라도 있을 것이다. 사이코패스의 문제는 동기의 부재가 아니라 어쩌면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범죄 심리학자나 정신 병리학자들은 만일 사이코패스에게 동기나 목적이 부재한다면 범죄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들은 연쇄 살인과 같은 끔찍한 범죄가 가능한 이유는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하는데, 이것은 통상 잔혹한 범죄 행위가 특정한 개인의 병리일 뿐만 아니라 도시적 황무지로 인해 왜곡된 현대인들의 병리라는 언급 속에서 사이코패스를 소시오패스로 일반화하는 주장으로까지 확대된다. 나는 자신들의 짜증과 앙심을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에 대비해 우리 사회 곳곳에 CCTV를 설치하게 된 일이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도시적 황무지를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의 전자 매체가 지닌 ‘원격 현전성’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 시각장(視覺場)으로 특징지을 수도 있다. 실제로 폴 비릴리오는 현대적 매체의 망원경적 시각이 수반하는 과도한 의사소통 과정이 화상 이미지 앞에서 망각적인 태만과 더불어 감정이입 능력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그러한 망원경적 지각의 폐해는 다양한 예술의 영역에서도 예외 없이 관찰된다며 일종의 예술적 묵시록을 펼쳐 보인다. 물론 비릴리오의 견해는 우리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배적인 정설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설에 따르면, 문학과 예술은 감정이입 능력을 발휘하고 타인들의 경험에 들어가 보려는 상상력을 통해 세상과 현실의 복잡성을 파악하며 도덕적 모호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영국의 위대한 전통을 이루고 있는 소설가 조지 엘리엇은 ‘예술이 사람의 공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점을 요약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새로이 등장한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들을 일별해 보면서, 나는 문학과 예술이란 그 자체로 치료요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병리의 징후가 되어가고 있다는 비릴리오적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들의 (몇몇) 소설작품은 사회 병리의 징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 병리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우리의 젊은 소설가들은 문학이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자 드러나지 않은 삶의 가치를 조명하고 평가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수긍하는 듯하다. 그리고 특별히 루저(loser)라는 말로 지칭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간주해온 사회적 편견에도 과감히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패배자들에 대한 문학적 감정이입을 구실로 실제로는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을 진실하게 포착하려는 그 공감의 참된 목적을 거의 망각한 상태로 보인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우수성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것만이 훌륭한 감수성과 선의의 증거가 되는 우리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환경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정말이지 오늘의 한국문학은 (특히 역량 있는) 젊은 소설가들을 통해 현실의 긴장과 불안에 대해 망상적인 해법을 뜬금없이 제공하는 감정이입 능력의 상실을 그처럼 자부심의 원천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상실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는 박민규의 『카스테라』(2005)이다. 지난 2003년 장편소설 두 편으로 두 개의 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후 박민규가 이 년 만에 펴냈던 그 소설집은 지금까지도 쇄를 거듭하며 꾸준한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작가 박민규가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바친 그 책에서 올바르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로 만들었을까? 아마도 문학적 지식인들의 열렬한 비평적 주목과 상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2000년대 한국 문단이 가장 사랑한 문학계의 총아’와 같은 허울 좋은 문구가 박힌 그들의 비평적 광고판은 건전한 현실 감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조차 박민규의 소설이 빤히 드러내고 있던 문제를 숨겨버리는 차단막이 되었다. 그 문제는 사실 타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작가가 지지하는)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다루는 방식에서 명백하다.

 

말하던 대로, 차례차례였다. 나는 학교를 집어넣고, 동사무소를 집어넣고, 신문사와 오락실과 7개의 대기업과, 5명의 경찰간부와, 낙도초등학교의 어린이들과, 경기고속 소속의 좌석버스와, 지하철 2호선과, 5종의 삼각김밥과, 11명의 방송국 PD와, 51개의 벤처기업과, 2명의 영화감독과, 3명의 소설가와, 192명의 공장장과, 5명의 회사원과, 31명의 수입업자와, 2명의 성형외과의사와, 3명의 댄스가수와, 두 사람의 취객과, 1마리의 비둘기와, 3명의 사채업자와, 2명의 프로레슬러와, 1명의 병아리 감별사와, 180만 명의 실직자와, 36만 명의 노숙자와, 67명의 국회위원과 대통령을 집어넣었다.// (···중략···) // 물론 그 후에도 참으로 많은 것들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그 중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을 집어넣은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한 기억은 사라졌지만, 아무튼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였다. 신문을 보다가 엉겁결에 물을 열고, 넣고, 닫은 것이다. 믿기지 않지만, 그러나 <미국>이 들어오자 냉장고 속은 일약 하나의 <국제사회>가 되어버렸다.

 

표제작 「카스테라」에 나오는 결정적인 에피소드의 일부인데, 냉장고 속에는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갔고, ‘학교’와 ‘미국’ 다음에는 ‘중국’마저 그 속에 들어갈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작가에 따르면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만 알면 되는데, 말하자면 감정이입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냉장고를 열고, 넣고, 닫으면 된다는 자기만족적인 현실 파악으로 대체되어 있다. 감정이입에는 현실을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 현실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관찰하는 자신에 대한 공감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 공감을 다시금 현실에 투영하지 않을 때, 그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려는 감정이입의 노력은 실패로 귀결된다. 본문을 관찰하고 이해를 형성한 다음 또 다시 그 이해를 본문에 조회하는 재귀적인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결코 본문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해석학적 순환’의 개념을 떠올려 보라! 작가의 냉장고 속 현실이 숫자와 직종 등으로 환원된 단순하고 제멋대로의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기존의 논의에 따르면, 박민규의 냉장고는 소중한 것은 많지 않고 거의 해악으로만 점철된 부패한 현실과 투쟁하기로 결심한 자신의 문학적 내면에 대한 은유이자 상징이다. 우리는 안다. 작가가 불만과 푸념과 불쾌감으로 가득 찬 자신의 내면과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려운 소음으로 현실 속 애물단지로 간주된 냉장고가 사실 그 역사를 통해 ‘부패와의 투쟁’을 줄기차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강한 발언권’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고, 마침내 그 ‘어둡고 은밀하고 서늘한 냉장의 세계’에 대한 애호를 통해 자기연민과 결합된 수치심을 자기정당화와 결합된 양심으로 슬며시 뒤집는 ‘환상적인’ 기교를 보여주리라는 것을. 실제로 박민규는 자신의 냉장고를 부패로 썩어가는 더러운 현실에 맞서 투쟁에 나서는 실존주의적 영웅으로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전생이 ‘훌리건’이었던 냉장고는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며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라고 속삭이며 눈물 흘리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렇다, 「카스테라」는 박민규의 작가적 출사표(出師表)인지도 모른다. 마땅히 한 작가의 탄생을 축하해야 하리라!

 

그렇지만 좀 뻔뻔스럽게 가족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잔다고 해서 아버지를 냉장고에 집어넣거나 좀 극성스럽게 성적표를 가지고 잔소리를 한다고 어머니를 냉장고에 넣는 훌리건적인 대처법은 ‘분명한 세상의 해악’이다. 사실 작가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식으로 현실을 처리하는 방식은 소설로부터 온 맹목의 어둡고 은밀하고 차가운 기념비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불만과 좌절이 인간이 바라는 것과 현실이 제공하는 것 사이의 불가피한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악의와 오해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군가 보기 싫은 장면에서 눈을 돌리듯 항구적인 어려움을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부터 자신의 시선을 거두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박민규의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 파악은 자신을 짜증나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제약과 금지만 사라진다면 인생이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안락을 제공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관념과 결합함으로써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기만적이고 재앙적인 해법에 이끌린다.

 

석현아. 통화를 끝내고 나자 기하 형이 말문을 열었다. 예. 기하 형은 의외로 초연한 얼굴이었다. 올라가라. 아니 그러면···이란 말이 절로 나왔지만, 그 말의 끝을 나는 맺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애초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어. 내일 아침이면 경찰도 오고 할 테니 걱정 말고 올라가거라. 이미 열시를 넘긴 시각이기도 해서, 나는 일단 이불을 깔았다. 내일 아침에 가는 한이 있어도, 지금 일어서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음이 복잡했다. 달은 밝고, 달빛에 잠긴 기하 형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 보여 나는 견딜 수 없었다. 형··· 괜찮으세요? <십칠 년 전의 여학생> 같은 것이, 그래서 내 입을 빌려 얘기했다. 십칠 년 전과 하나 다름없는 목소리가, 그래서 어둠을 건너왔다. 괜찮을 리가 있겠니. 이제···어쩌실 생각이세요?// 모르겠다.// (···중략···) 기하 형이 격하게 내 몸을 흔들었다. 방 전체가 환하고 눈부셨지만, 햇살과 같은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안경을 찾아 쓰니, 창을 통해 거대한 발광체의 일부가 엿보였다. 원반이었다. 길고 완만한 기체(機體)가 정말로 눈앞에 떠 있었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원반은 한참을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점점 이동을 시작했다. 우웅우웅.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일곱 대의 원반이 멀리 논 위의 상공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이 대목은 「코리언 스텐더즈」의 클라이맥스인데, 후배는 과거 운동권에 함께 있었던 선배의 요청으로 어느 날 그를 찾는다. 그동안 선배는 세상이 변해 모두가 정치인이나 학원 강사로 살 길을 모색하는 와중에도 이번엔 농촌을 살려야 한다며 일종의 공동체를 운영해 왔다. 그런데 후배가 찾았을 즈음엔 연수생 대부분이 그곳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선배는 소위 ‘한국사회의 문제점’ 때문에 온갖 좌절들을 떠안은 상태였다. 하지만 찾아온 후배에게 별안간 ‘외계인의 습격’까지 받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선배는 시종일관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후배는 선배와 함께 ‘거대한 발광체’의 무리를 목격하게 된다. 말이 되냐고? 분명 ‘현실성’ 없는 허구지만,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작가의 해법에 따르면 ‘이상할 정도로’ 개연성이 충분한 우화로 읽힌다. 이 우화의 교훈은 명백하다. 이미 ‘인간은 서로에게, 누구나 외계인’이니까 놀라지 말고 후배처럼 선배와 함께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감정이입의 상실로부터 오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파탄의 결과를 그 선배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사실상 유심론적 괴짜의 책인 『카스테라』는 외견상의 다채로움에 불구하고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해법에서 ‘의외로’ 일관성을 가진다. 대체로 두 가지 단계를 그 해법의 ‘한국적 표준’으로 제시하는데, 먼저 현실에 대한 거친 단정의 절차가 선행한다. 예를 들면 “세상은 엉망이다,” “인류의 몽따주는 얼마나 슬픈 것인가,” “아무튼 이 나라는 고장이다,” “인간이란 별게 아니란 생각이 그때 들었다” 등등. 단정적인 문구를 통해 현실을 추상화하는 이 그저 그런 (작가의 용어로는) ‘일반론적인’ 아포리즘들에서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기의 관점 말고는 타인의 관점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것, 즉 상상력의 결여다. 대신에 결여된 상상력은 현실을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보충된다. 이것이 두 번째 절차인데, 가령 ‘너구리’ 인간에 대한 게임중독 형 망상, 하늘 위 ‘개복치 여관’에 대한 뜬구름 형 망상, 유원지에 착륙한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에 대한 논다니 형 망상, 그리고 거대한 KS표시로 강림한 ‘외계인’에 대한 쇼핑중독 형 망상 등이 있다. 여기서는 공상에 대한 낭만적 숭배에 따르는 한 줌도 안 되는 현실성조차 현실을 무시하는 ‘상념’으로 대체되고 만다.

 

물론 “우주는 하나의 사유(思惟)입니다”를 “무엇보다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작가가 “세상의 <관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만큼은 진실을 가리킨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작가로 하여금 망상벽에 탐닉하도록 만들었을까? 한마디로 금지를 금지함으로써 모든 욕망의 즉각적인 충족을 달성하려는 그의 불굴의 이기심이 원인인데, 말하자면 현실을 제거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허무맹랑한 자기신뢰가 그것이다. 실제로 박민규에게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의 좋은 기분’으로 수렴되는 ‘<즐거움의 문제>’로 나타난다. 의심의 여지없이, 작가는 현실이라는 것이 어려움의 근절과 함께 ‘좋은 기분’을 가져다 줄 거라는 관념, 즉 만일 ‘즐거움’에 대한 장애물이 제거된다면 인류는 쉽게 즐거워질 거라는 속류 유토피아주의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쁜 것은, 현실의 제약에서 오는 작가의 불만이 자기연민과 경쟁하는 자기정당화와 결합함으로써 아주 공격적인 양상으로 이어지는 데 있다. 「헤드락」에 나오는 ‘습격’에 고무된 이기적 ‘쾌감’이 그 징후인데, 현실과 타협할 때와 그것에 저항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성숙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성인식이 필요한 사람들로는 또 다른 작가 김애란의 인물들 대다수도 포함되는데, 특히 그녀가 두 번째로 출간했던 소설집 『침이 고인다』(2007)는 겉보기와는 달리 박민규의 경향과 가장 근접한 작가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거듭된 포상과 더불어 그 책이 2009년까지 12쇄 가까이 발행된 것을 보면, 그 소설집에 주목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주목의 이유가 완전히 다르다는 데 있다. 사실 김애란도 그동안 약점보다는 강점이 강조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유머러스한 문체와 잘 짜인 서사적 이미지 등을 바탕으로 세련된 기교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법이 문학적인 결함을 완벽하게 보충하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결함을 밀어낸 기법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논란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노골적인 박민규의 소설보다 세련된 김애란의 소설은 훨씬 더 치명적일지 모른다. 눈을 더 크게 떠야 하는 이유이다.

 

모든 게 거짓말 같고 또 정말인 것 같았다. 그녀는 후배의 존재가 허구처럼 느껴졌다. 나를 속이려고 하는 걸까. 후배의 집에 있는 거짓말 창고엔, 유통 기한이 지난 인삼껌이 백 통도 넘게 쌓여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요새도 시중에 인삼껌이 나오던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후배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사양하다, 결국 껌 반쪽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껌 조각을 화장대 위 영수증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껌 같은 거, 후배가 나가기 전에만 돌려주면 되는 거니까. 어쨌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그날 밤, 후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 때문에 후배와 살게 된 건지도 몰랐다.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도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이 장면은 표제작 「침이 고인다」의 일부인데, 학원 강사로 힘겹게 사는 선배는 ‘껌 한 통’을 주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불행한 기억으로 조건화된 단물의 위로를 통해 ‘참혹한 시간들’을 어려움 없이 넘어간다는 후배의 주술에 걸려든다. 그리고 잠시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선배는 후배의 파블로프적 마법의 세계에서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될 것인데, 그녀는 얼마 후 후배를 내보내게 됨에도 불구하고 후배가 나누어 준 껌 반쪽을 무심코 씹으며 결국 그 손쉬운 자기위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작(詛嚼)의 달착지근한 자기위안이 지닌 의미는 명백하다. 자기위안은 행동의 근거를 알려주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직시 대신 자기 자신을 향한 공감에만 탐닉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의 도피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현실 대응에서 박민규가 제시한 한국적 표준과는 다른 ‘새로운 한국적 표준’이 제시된다는 점인데, 김애란의 경우는 선배가 후배를 모방한다. 만일 이것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성차별적인 발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족을 기초로 (선배를 따르며) 타인에 대해 공격성을 표출하는 박민규와 비교해 볼 때, 사실상 김애란은 자기위안을 근거로 (후배를 감싸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남성적 정의보다는 여성적 미화를 선호하는 셈인데, 실제로 「침이 고인다」는 현실을 ‘허구’로 대체해버리는 것을 무엇보다 ‘아름다운’ 일로 만들고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론가들은 종종 그녀의 소설이 어려운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 현실에 대한 초연함을 통해 불행한 의식을 떨쳐버리는 미적 존재론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흔히 그래왔듯이 집요한 방식으로 사회와 반목하는 특정한 개인에게서 자율적 자아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일반적인 사회의 시각보다는 구체적인 개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초대하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에 대한 감정을 제거한 후배의 ‘한없이 투명한 표정’은 악의를 선의로 무안하게 만드는 윤리적 감수성의 상징적인 증거라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심미적 정당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윤리성이라기보다는 미학이 현실감각을 찬탈하려는 경향이다. 후배의 주술에 걸리기 전까지, 선배는 감기에 걸리면서도 학원 강사라는 자신의 직분에 대체로 충실하다. 비록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인생이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자기가 생각하는 것 사이의 타협점을 발견해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그녀는 안다. 반면에 후배는 선배의 호의를 입은 이후에도 이불에다 ‘생리혈’을 묻히는 등 ‘작은 실수들’을 범하면서도 거의 무신경하다. 만약 현실을 알고 자신이 교제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가능했다면, 그녀는 사회보다 개인이 우월하다는 교설이 거짓임을 깨닫고 보헤미안적 방종의 삶으로 곧바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소설의 결말을 통해 그러한 자명한 사실을 반어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심지어 후배의 거짓에 선배의 진실을 능가하는 낭만적 깊이마저 부여한다. 사회적 실존을 외면하는 이른바 ‘도도한 생활’의 유혹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셈이다.

 

바람이 불자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들이 일제히 팔랑거렸다. 방 있습니다. 전/월세. 풀 옵션. 바람에 나부끼는 전화번호들. 주인 없는 숫자들이 도시 위로 풀씨처럼 날아갔다. 동생은 꽤 비싼 가격이 적혀 있는 전단지를 내밀며 장난치듯 말했다./ “우리 이 집 한번 가볼까? 계약 안 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이 정도 가격의 집은 어떤지 구경해보자.”/ 그들은 그날 돌아본 방 중 가장 비싼 방을 보러 갔다. 정말 참고나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햇빛이 쏟아지는 탁 트인 원룸 안에 발을 디딘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깨닫고 말았다. 자신들이 살고 싶던 방은, 원래 이런 곳이었다고. 그들은 결국 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월세 부담이 컸지만 한 번쯤 ‘무리’라는 걸 모른 척하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영화관이나 놀이 공원처럼 잠깐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환상이라 하더라도, 이제 분수껏 사는 일은 지겨워져 버렸다고 떼를 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사내는 이사 후 한 달 동안 동생과 새 집의 장점에 대해 말하며 보냈다. 신발장이 따로 있으니 번잡하지 않아 좋다, 욕실 바닥이 아가씨 얼굴처럼 참 깨끗하다, 가스레인지 위에 환풍기도 있네. 사내는 이 방에서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년에 동생이 결혼하면 보증금을 나눠줄 생각이다. 사내는 다시 몇 년 전의 방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김애란의 「성탄특선」에 나오는 다양한 에피소드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내용은 아주 단순한데, ‘서울살이 10여 년’에 이른 한 사내와 그의 여동생이 보내게 된 어느 크리스마스 날 이야기이다. 여동생과 함께 사는 사내는 마음 놓고 섹스를 나눌 방을 가지지 못해 애인이 떠났다고 생각하며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다. 그리고 심심해하며 데이트를 하러 나간 동생에게 ‘짓궂은 문자 메시지’를 (나무라기보다는 격려하기 위해) 연신 날린다. 그런가 하면 여동생은 매년 이런저런 일로 크리스마스 섹스를 미루어오다 비로소 애인과 함께 하게 된다. 하지만 온갖 노력 끝에 구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새침해서가 아니라 그곳이 후지다는 이유로) 섹스도 나누지 않고 그냥 나오고 만다. ‘분수껏 사는 일’ 대신 ‘월세’로 ‘비싼 방’을 얻은 일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물론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의 이해는 ‘햇빛이 쏟아지는 탁 트인 원룸’에 대한 사내와 여동생의 ‘도도한’ 선택이 아니라 그들의 즉흥성과 허영심이 야기하고 있는 것이 뻔한 ‘성탄특선’처럼 ‘빤한’ 인생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의 에피고넨들이 받아들이기에는 특히 어려운 교훈일지 모른다.

 

실제로 『침이 고인다』라는 책은 피아노를 앞에 두고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라는 말이 갖고 싶었다”는 딸의 허영심과 빚더미를 뒤에 두고 “오토바이 ‘쇼바’를 잔뜩 올린 채 도로를 달리며 울고 있었다”는 아빠의 즉흥성으로 구조화된 삶의 파편들을 ‘플라이데이터리코더’로 아름답게 치환한다. 우리는 그 ‘블랙박스’ 안에서 아이를 남긴 채 “화재가 난 여관방에서 벌거벗은 사내와 함께” ‘타다 만’ 엄마와 가족 채무의 원인이 되어 있는 “찬성만 하고 아무 신경도 안 쓰는” ‘좀 난감한’ 아빠를 추가로 발견하게 되는데, 사실 ‘순간을 사는’ 삶이라는 작가의 헌사는 좀 난감한 연민으로 충만해 있다. 왜냐하면 무책임하고 불쾌한 경박함이 연민으로 미화되면서 그러한 삶에 모종의 가치를 부여하는 구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속되고 자기중심적이며 절제가 부족한 세계를 뭔가 미학적으로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것처럼 다루면서 현재와 순간만으로 제한된 (작가의 말로는 ‘유통 기한이 정해진’) 삶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느 순간 그녀의 주동인물들은 개인적인 실패를 사회적인 실패로 간주하는 감정이입의 실패를 통해 드디어 사회가 ‘나쁘다’ 하고 중얼거리기에 이른다.

 

그런데 가령 (셰익스피어의 현명한 퀴클리 주모를 닮은) 여인숙 여주인이 섹스를 위해 찾아온 연인에게 방을 내주며 “술은 무슨 술. 가만 보면 여기 와서 술, 담배 하는 애들치고 돈 모아서 나가는 애들 못”봤다고 말한 일은 정말로 나쁜 것일까? 그럴 리가,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정확한 진실을 담고 있다. ‘나쁘다’의 자기기만은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왜곡을 통해 완전히 은폐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자기이상화의 요소가 있다는 지적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리고 자기이상화에 자기연민의 요소가 따라다닌다고 말하면 좀 더 뜨끔한 비판이 될 것이다. 박민규와는 반대로 ‘지나가는’ 삶에 대한 루저들의 그러한 자기연민은 ‘순간을 사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철없는 이상화 앞에 놓이는 셈인데, 이것은 불길하게도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들이 큰 상처를 준 현실을 치료하고자 하는 음모, 즉 일종의 프로이트적 반동 형성을 결행할 가능성을 높인다. 무엇보다도 「칼자국」에 나오는 ‘신랄하고 우아한 빛’으로 미화된 엄마의 칼이 숨긴 메스적 성격은 그 징후로 보이는데, 여기서 김애란의 자기연민은 ‘우주의 윤리’이기는커녕 사이코패스의 전의식(前意識)이 된다.

 

물론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감정이입 능력의 상실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의 원인을 타인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고무함으로써 자기반성을 좌절시키고 인간성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마지막 소설이 아니다. 그녀의 소설을 좀 더 최근에 나온 다른 소설들과 비교해 보면, 문학적 재앙에 대한 나의 우려 섞인 혹평이 지나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경미는 『게으름을 죽여라』(2009)를 통해 자아에 대한 낭만적 정당화를 급진화함으로써 자신의 소설들을 아예 사이코패스 매트릭스(matrix)로 만든다. 이 과정은 대개 이렇게 전개된다. 우선 ‘진정한 나’라는 루소적 교리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현상적인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사장을 테러하고 여자를 희롱하며 나이프를 들고 마트를 털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나’는 그런 미친 행동들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순결한 자아로 등극하는데, 이때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존감의 유지가 가능하다. 마침내 「게으름을 죽여라」라는 표제작에서는 게으른 자들이 그런 자아들의 영웅으로 격상된다.

 

이것은 사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손쉬운 아이러니를 닮아 있는데, 우리에게는 진지하게 맞붙어 싸워야 하는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어떤 도덕적 의미를 갖게 되려면, 현상적인 자아가 진정한 자아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타인들에 의해 보증되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구경미는 타인의 보증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경향에 대한 지지와 동조를 거침없이 표명한다. 이러한 난센스는 가령 「은자와 함께」의 경우 ‘영은’의 애인 ‘동호’에 대한 지지와 동조에서 전형적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소설들은 문장과 서사에서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선전하려는 관념에서도 매우 피상적인 작품들로 보인다. 특히 작가의 조잡한 아이러니는 『침이 고인다』와도 비교되는데, 미묘함이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아이러니는 분명히 서툰 것이다. 그러나 김애란과 구경미의 관계는 오히려 싱거운 맥주와 독한 위스키의 관계와 같다. 왜냐하면 구경미는 ‘개인의 진정성’이 도덕적 삶이나 사회적 실존을 면제해준다는 급진적이 된 낭만주의적 신념을 주저 없이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치명적인 폭탄주는 만들어질 것이다. 자기 탐닉을 통해 스스로를 폭력적인 반격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사이코패스의 소설은 (기우이길 바라지만) 구경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현실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 현실의 한계가 작가들의 말처럼 현실 그 자체를 완전히 무가치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뛰어난 작가들은 자아라는 데카르트적 원리에서 현실을 유추하는 대신 감정이입 능력의 발휘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합당한 조화를 모색하는 현실적인 지혜를 모색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른바 ‘문학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러한 심오함은 (현대적 문화의 가장 큰 해악 중의 하나인) 타인의 욕망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고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관대한 자존감의 시대에는 아무래도 호소력을 갖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작가들이 대중의 호감을 얻어내려는 개인적 야심에서 어쩌면 자신들도 믿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신념들을 전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현실에 대한 공격을 통해 범죄에 대한 관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 세상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일까?

 

최근의 젊은 작가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 모양이지만,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세상에서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혹시 자신만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이 붕괴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대중의 주목이라는 공리주의적 결과로 슬쩍 가리고서는 어깨를 으쓱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바로 내가 우리 문학 동네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지나치지 않은 이유인데,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도 자기 집에 물을 뿌려댔던 버크를 떠올려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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