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곤경

문학의 곤경

택선고집 2010. 7. 17. 15:49

문학의 곤경

 

오양진

 

오래전 18세기에 한 프랑스 인은 매일 아침 두꺼비 한 마리를 삼켜야만 하루 종일 그보다 더 역겨운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붐비는 곳을 걸으려고 마음먹었다면, 두꺼비 한 마리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젊은이들, 특히 머리카락을 싸구려 무스로 곤두세우거나 귀나 배꼽 주변에 날카로운 금속들을 박아 넣은 그런 젊은이들은 자기들에게 권리가 있는 어떤 것을 이유 없이 빼앗긴 것처럼 공격적으로 주변을 흘낏거리고 화가 난 듯이 거칠고 상스러운 욕설을 수시로 내뱉는다. 여기에는 주먹과 타액이 곁들여질 때도 있는데, 물론 수많은 젊은이들이 채우고 있는 유흥가 주변의 골목들에서는 말 그대로 흥겨운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모욕당했다는 느낌을 상쇄시키려고 젊은이들과 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넘겨 눈을 마주치는 것은 일종의 도전으로 간주되어 위협적인 반응을 초래하게 된다.

 

김빠진 알코올 냄새와 역겨운 토사물의 냄새, 그리고 온갖 방종의 냄새와 뒤섞인 유흥가를 멀리 벗어나 있다고 해서 안심할 일도 아니다. 나는 최근에 집 근처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된다. 가방을 둘러멘 한 무리의 남자 애들이 이미 바뀐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차량들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로 달려들었다가 어떤 학원 버스와 부딪힐 뻔했는데, 그 애들은 보행자의 권리 운운하며 버스 운전기사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을 퍼부었다. 놀라운 것은 여학생들조차 공격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을 때, 딸아이를 데리고 근처 문화회관으로 향하던 나는 하늘색 플라스틱 핀으로 단발머리를 산뜻하게 고정시킨 선홍빛 입술의 여자 애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으르렁거림을 들었다. “너 그 새끼 좋아하지.” “씨발, 아냐.” “존나 좋아하잖아.” “꺼져, 이년아.” 나는 재빨리 딸아이의 귀를 막아야만 했는데, 그때 그 여자 애들의 눈빛은 경멸과 조롱으로 일그러졌다. 이제 젊은이들의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욕설들을 듣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은 우리 사회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만약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지적 성역으로서의 대학만큼은 아직 예외라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크나큰 착각은 없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씨발’은 온갖 감정적 불쾌함에 편리하게 호응하는 역동적 추임새이고 ‘존나’는 모든 대화에 상시적으로 수반되는 필수적인 선행사이다. 실제로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에서 아주 편안하게 욕설을 내뱉는 대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하는데, 그때마다 정말이지 나는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서 숨조차 바로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그들이 위협이나 공격의 기미 없이 욕설을 내뱉는다는 것은 유흥가 젊은이들의 행동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력적인 언어 습관에서 드러나는 그런 가족적 유사성은 여전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적어도 그와 같은 언어적 폭력에 대한 상상적인 공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학 사회 내에서 불거진 ‘막말녀’ 사건은 바로 그 공감이 실재의 삶에서 재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란 어느 사회에서든 그 공간의 경험적 구조와 삶의 질을 암시하는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대학에서 교양이나 예의를 형성하는 표준적인 언어를 당연하게 사용해온 사람들이 현재 저급하고 상스러운 욕설로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근심스러운 변화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등 문화적 향상에 필요한 표지들을 지우는 데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크고 작은 조짐들은 모든 곳에 있는데, 대학의 젊은이들이 유흥가의 젊은이들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대중적 유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은 비근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쁜 것은, 천박하고 통속적인 언행을 일삼는 대학생들이 현재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도덕적으로 그릇된 존재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특히 문화적 좌파들은 교양이 문화적인 상식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을 공격하는 모든 것에 반문화적인 명예를 부여함으로써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정치학을 구성한다. 파괴하려는 충동은 창조하려는 충동이라는 바쿠닌적 명제는 그들에게 일종의 금과옥조가 되는 셈이다.

 

창조적 파괴의 이념이 기승을 부리는 곳은 무엇보다도 문학의 영역이다. 최근 우리의 문학적 지식인들은 관습과 금기를 함부로 깨는 행위에서 자신들의 독창성과 자유에의 용기 등을 확인 받으려는 많은 지식인들의 전형이 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그 금기가 깨어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나 그렇게 제약이 사라져버릴 때의 사회적 결과는 대개 관심 밖에 있다. 물론 개인적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사려 깊고 교양 있는 대부분의 문학인들은 그러한 제약을 진정한 문화의 일부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경계 없는 삶에 대한 지지로 인해 대중과 지식인들로부터 상찬 받게 될 가능성 앞에서 그들에게 그따위 문화는 오히려 사라져도 무방한 것으로 규정된다. 요즘에는 더럽고 비천하고 저급한 것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문학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부정확하고 통속적이고 천박한 말조차도 그런 식으로 용인되고 있다.

 

금기를 깨는 데 열중하는 문학들에게는 결과적으로 더 나쁜 것이 더 좋은 것인데, 이것은 나에게 창조적 파괴는 파괴적인 창조에 귀결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암시로 다가온다. 이러한 암시는 요사이 내가 접한 소설들 중, 가령 김사과의 소설에서 표준적으로 나타난다. 『미나』(창작과비평사, 2008)라는 그 반문화적 성장소설은 벌써 3쇄를 찍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소설은 기성의 제도적 질서에 대한 도발을 목표로 삼고 저속하고 극단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주목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 소설은 정치적 유토피아주의를 높이 고양시킴으로써 싹쓸이 스타일로 현실적인 모든 것을 폄훼하는데, 말하자면 김사과는 우라노스를 제반 가치들의 정상에 올려놓고 코스모스를 심히 열등하게 평가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유치하고 폭력적인 사춘기적인 문학 실험에는 자신의 주제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지 못하고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일종의 반문화적인 선동책자를 쓰고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그 이야기는 단순하다. 대개의 청소년들은 집과 학교, 학원과 노래방을 전전하며 괴로운 ‘학생의 삶’을 살아간다. 그 중에는 경쟁의 고통을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거나 향상시켜줄 기회로 간주하는 영악한 학생들도 있고, 그 고통에 떠밀려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독서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극단적인 학생들도 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나와 수정도 그러한 비정상적인 삶에서 자유롭지 못한 청소년들인데, 영악한 학생의 전형인 수정은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에 완벽하게 적응한 소위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나오고, 가까운 친구의 죽음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에 노출된 미나는 ‘이 시대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학생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소설은 이러한 대조적 면모로부터 다소 놀라운 파국적 결말을 이끌어내는데, 문법적 정확성을 중시하고 ‘극기훈련’에 열광하는 수정은 풍요로운 감정을 존중하고 ‘대안학교’를 찾아가는 미나를 부러움과 경멸이라는 모순된 감정으로 대하며 모방과 배척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미나를 칼로 잔인하게 찔러 죽이게 된다.

 

······미나가 지르는 비명과 날카로운 금속조각에 찢기는 살의 소음은 너무나도 멀리서 들려와서 수정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수정은 미나의 벌어진 입을 바라보며 반복하여 찌른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

“너, 때문에 너무 머리가 아파왔어. 그동안. 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니가 나를 방해했어. 너 때문에 뒤돌아봤고 너 때문에 생각했고 너 때문에 궁금했어. 니가 나를 속여넘겼어. 왜 그랬어 미나야? 울고 싶어하지만 나는 웃을게. 정말이야. 너는 피를 흘리고 나는 웃는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어. 하지만 안 울 거야. 울면 지는 거야. 비웃음을 당하는 거야. 복잡해지는 거야. 쓰레기가 되는 거고. 장애물이 되는 거야.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는 달려간다. 이수정. 끝까지 달려가서 승리한다. 나는 달려간다. 이수정! 달려간다. 이수정. 성공한다. 이수정. 성공한다. 아무 문제없다. 이수정. 이제 너는 숨을 쉬지도 않네. 하지만 잊지 마. 잊지 않을 거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여봐. 그렇다고 말해봐······”

피투성이의 미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힘없이 삐져나온 발목은 흐르지도 쌓이지도 않는 매끄러운 흰 살로 되어 있다. 수정이 놀라 뒷걸음친다. 주위가 빠르게 어두워진다. 멀리서 마돈나의 노래가 들려온다. 수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수정이 부르는 노래는 ‘마돈나’의 <보그>라는 곡인데, 여기서 작가의 의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추종하는 ‘유행’의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은 미나처럼 불필요한 의문과 복잡한 고민으로 제도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장애물’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을 반드시 제거해 버리고야 마는 기성의 ‘시스템’이란 수정이라는 인물처럼 아주 끔찍하고 가공할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시종일관 소설은 현실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한 모범생에게서는 모든 덕성들을 떼어내고 비열한 언행들만을 나타내도록 하고, 반대로 현실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어느 불량소녀에게는 그녀가 어떤 저열한 언행들을 일삼더라도 고상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온갖 악덕은 모범생의 것이고 모든 미덕은 불량소녀에게만 속하는 이 반문화적인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정치적 열정은 불가피하게 주인공들에게 자연스럽고 알맞은 감정과 행동을 부여하려는 작가적 열정을 넘어가고 마는데, 이때 문학작품이 아니고서는 성취하기 어려운 교화적 영향들 중의 하나가 말살된다.

 

이처럼 김사과는 진실을 발견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작가의 관심은 오로지 진실을 선언하는 것에 있다. 물론 그녀는 종종 예리한 관찰력으로 젊은이들의 문화가 아무런 제지 없이 번성하게 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결과들을 직관한다. 예를 들면 ‘헤드폰’을 늘 끼고 다니는 청소년들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산업화된 팝 음악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으며, 그 결과 ‘욕’과 ‘술·담배’와 ‘섹스’에 친숙한 젊은이들의 문화는 일종의 각성된 앎과 성적 조숙성에 부착됨으로써 자제력과 극기의 미덕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사춘기적인 미성숙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조숙한 각성에 히스테리컬한 ‘장난’이 수반되기도 하는데, ‘목 졸리기’(최근에는 ‘목숨 턱걸이’가 유행 중이라고 한다)와 같은 자기 파괴의 유행병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젊은이들의 문화적 지배 속에서 어른들과 ‘상의’하지 않는 조숙성이 성숙한 삶을 대신하는 세상은 모든 종류의 정감이 부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야. 나야. 나와봐.” 김별의 낮고 초조한 목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린다.

“니가 여길 왜 왔어. 빨리 집으로 돌아가. 나 학원······”

“나와봐 좀!” 김별은 낮게, 그러나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린다.

(······중략······)

“기다려.”

김별은 아파트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시장바구니를 든 두 중년여자가 못마땅한 그러나 약간은 겁에 질린 딱딱한 얼굴로 김별을 바라보며 단지를 가로지른다.

(······중략······)

김별이 일어난다. 담배를 발로 밟아끄더니 다짜고짜 수정의 팔을 잡아채어 끌고 가기 시작한다. 수정이 팔을 빼보려고 하지만 팔이 마치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뻣뻣하다. 수정은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아파트 입구까지 끌려간다.

“아파!”

수정이 가까스로 소리를 지르자 김별이 멈춰선다. 수정이 손목을 감싸안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괜찮아? 삐었어?”

수정이 김별을 노려본다. “아. 씨발.”

 

수정에게 김별이라는 남자친구가 예고 없이 방문한 장면이다. 그녀는 ‘키스’도 하고 자신의 ‘팬티’에 손을 집어넣는 일을 허락하기도 했던 그에게 갑자기 이별을 통고했는데, 단지 미나의 오빠 민호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수정이나 김별과 같은 청소년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쾌락주의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이자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수정이 새끼 고양이를 죽이는 대목은 무엇보다도 타인에 대한 순수하고 진심어린 애정이 결여된 그러한 무정하고 무관심한 세계의 특성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무감동한 언행들이 뿜어내는 알렉스(앤서니 버제스의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오는 주인공) 식 냉정함의 위협적 기운 앞에서 어른들은 대개 ‘딱딱한’ 표정이 되고, 심지어는 ‘겁에 질린’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인데, 이제 담배를 피우며 흘낏거리는 청소년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미나』는 분노와 반항으로 동요하는 젊은이들의 방종과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정확히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예술이 비관습성을 존중하는 영역이라는 미학적 알리바이를 가지고서 나이든 사람들로부터 청소년들로 향하는 사회적 권위의 이동에 깊이 공감하고, 바로 사춘기적인 문화의 일부가 되려 한다. 실제로 그녀는 그 이동이 ‘다양성’을 억압하며 획일적인 체제를 강요하는 교육과 입시의 ‘지옥’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에 따르면, 젊은이들의 반문화적인 언행은 모두에게 가치 있는 것을 파괴하기는커녕 다양성을 존중하고 관용적인 분위기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다시 말해 개인적 감정과 유치한 변덕이 언행을 이끌어가는 유일한 권위가 되는 홉스적 세계만이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인데, 김사과에게는 사회적으로 조건화됨으로써 위선적이 된 모범생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불량 청소년들이 더 나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사실이다! 씨발 그래 우리집 존나 부자다! 그래 됐냐? 아니 이게 아니지. 이게 아닌데. 씨발 너 진짜 짜증나. 그래 우리집이 부자라고 치자. 아니 이것도 아니지.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는 왜 그런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냐? 그래 이거다. 아니 이것도 아닌데. 야······ 아 존나······ 너 때문에 다 까먹었어. 책임져. 씨발······ 아냐 생각났어. 생각났어. 그래······ 확실히 너는 나보다 똑똑해. 그리고 니네 집이 우리집보다 부자는 아니라고 해도. 그리고 사실 우리집도 부자는 아냐. 우리집 빚 장난 아닌 거 너 모르지? 우리 엄마 진짜 불쌍하다. 씨발 내가 왜 이딴 얘기를 너한테 하냐. 짜증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런 표정 짓지 마. 너 싫어. 너 이 빌라에서 국산차 모는 집 우리집밖에 없는 거 그것도 모르지? 우리집 벼락부자인 거 너도 잘 알잖아?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다들 뒤에서 존나 씹어대. 너 우리집이 옛날에 어땠는지 알아? 존나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못살았어. 매달 생활비 걱정하고. 그렇다고 지금 걱정 안한다는 건 아냐. 어려서 나 시장에서 옷 사입었어, 됐냐? 그리고 시장에서 씨발 김치만두가 먹고 싶은데 씨발 엄마가 돈 없다고 안 사준다고 그래서 울었다가 진짜 뒈지게 맞은 적도 있어. 너는 그런 적 있냐? 너는 그런 적 있냐? 너는 그런 적 없잖아. 어떻게 따지면 니가 나보다 잘살잖아. ······”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들의 진정성을 특히 ‘씨발’이나 ‘존나’와 같은 비속어를 채택함으로써 부각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그 진정성이 언어적 소통을 통해 공유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어떤 감정과 생각도 막힌 병 속에서 윙윙 대는 한 마리 파리처럼 제어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로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의 감정과 생각은 그들 자신에게도 불투명한 것, 말하자면 언어적 이유에서 그들이 그것을 어떤 종류의 전망이나 일관된 질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뒤죽박죽일 뿐인 그런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적 소통에서 표준적이고 문법적인 언어를 익혀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되는데, 아무리 영리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지능을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범죄적으로, 그리하여 자멸적으로 사용하기 쉽다.

 

당연히 비속어와 범죄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인데, 김사과가 『미나』에서 그 비속어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그녀가 젊은이들의 분노와 반항을 자기 방기와 범죄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상의 표현으로서 간주한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실제로 이 후자의 좀 더 피상적이고 경솔한 견해는 정확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포멀한’ 언어가 있다는 수정의 엘리트주의적 관념에 대한 공격을 통해 드러난다. 즉 진정성이 의심되는 문법적 정확성의 교육은 “극도의 효율성을 바탕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항들을 제거해나가야” 하는 사회적 ‘통제’의 억압적인 실행일 뿐이고, 엘리트와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이 ‘하층계급’에게서 ‘자아존중감’을 박탈하고 그들을 영구적인 예속 상태에 묶어두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교육수준[만]이 가져오는” 그런 엘리트들의 언어적 ‘허영심’에 대한 거부는 부당한 지배에 대한 저항이자 모든 소통 형식들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정치적 유토피아주의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 미나의 그것은 물론 ‘맑스’를 계승한 ‘들뢰즈’와 ‘데리다’ 같은 문화적 좌파들의 선동적인 이론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런 지식인이 사용하는 세련된 표현들을 작가가 자신의 작품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았다 하더라도, 사실 그녀의 소설은 불량 청소년들을 만족시키는 온갖 비속어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나』의 저자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은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저자의 언어적 비행들이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감정적 희열과 관계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는 특별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다. 명백히 그녀는 천박하고 저급한 언어가 익숙하고 편리한 것 같은데, 그런 작가로서는 표준 국어의 요소들은 전부 허위일 뿐이고 개인적으로 특정한 언어들만이 진정성을 갖는다는 이론이 얼마나 큰 자유이고 기쁨이겠는가! 요컨대 이 문법적 자유주의자는 ‘무서운 여고생 집단 성’이라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이 포르노를 많이 보는 것을 ‘단순한 문제’이자 권리의 문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자유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자들은 항상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뒤로 밀려난 진정하고 자유로운 자아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환경이 인간을 자유라는 자아의 참된 본성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베버적 쇠우리인 셈인데, 인간은 자유롭지만 사회가 그를 억압한다는 그러한 자유주의적 전제는 결국 ‘상처 받은 자아’라는 테제와 결합된다. 그런데 ‘진정한 자아’는 어떤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종종 의지할 곳 없는 이 세상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태양왕과도 같은 위세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어준다. ‘진정한 자아’는 언제나 옳으므로 누군가의 삶을 좌절시키고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적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들 가운데, 가령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김혜나의 『제리』(민음사, 2010)는 그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사회적 환경이 사람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연결되는 일은 없다는 점에서, 좌절과 실패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의 악의로부터 온다는 생각은 기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인선 전철역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제리』에서 주인공은 수도권의 한 2년제 야간 대학에 다니는 21세의 여대생이다. 그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일찌감치 ‘문제아’로 낙인찍혀 냉대와 차별을 당하던 ‘날라리’ 여학생이었고, 지금은 재수 끝에 겨우 인천의 2년제 대학 야간반에 다니지만 ‘꿈’을 잃고 유흥가 주위에서 술과 섹스와 피어싱 등으로 소일하는 ‘골 빈 여자애’가 되어 있다. 새롭고 특별한 인생을 열망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체념한 그녀의 인생은 한마디로 루저의 그것인 셈인데, 이러한 ‘글러 먹은 인생’에게 호스트로 일하는 제리와의 만남은 작지 않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에이스와 같은 삶’을 위한 경쟁으로부터 밀려난 실패자라는 점에서 그가 자신과 닮은꼴이라는 동병상련의 감정으로부터 오게 되는데, 이를 통해 주인공은 마침내 ‘에이스’만을 환영하는 이 사회가 ‘언제나 나를 따돌리고 억누르는’ 세계임을 깨닫는다.

 

······어둠침침한 노래방 안에서 오로지 그 수족관만이 형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려니 너무도 눈이 부셔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손등을 이마에 갖다 대고 빛을 가리면서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네모난 모양의 수족관은 노래방의 한쪽 벽면을 다 메울 만큼 크고 넓었다. 바닥에는 희고 검은 돌멩이들이 깔려 있고 그 위로 모형 집과 인공 수초가 자리해 있었다. 물이끼가 잔뜩 낀 탓인지 물의 색깔이 묘하게 푸르스름했다. 그 안에서, 주홍빛 금붕어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작고 조그마한 그들이 아가미와 주둥이를 벌리고 닫을 적마다 주홍빛 몸체가 크게 부풀어졌다가 다시 쪼그라들었다. 수조의 유리벽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더러운 수족관 속에서, 가짜 집과 수초 사이에서, 금붕어는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 나갔다.

그들 모두는 끊임없이 헤엄을 치며 어딘가로 향하는 듯했지만 어느 누구도 수족관 밖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움직이기를 멈추는 금붕어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주인공이 노래방에서 제리와의 섹스를 끝내고 발견하게 된 ‘네모난 모양의 수족관’에 대해 작가가 부여하는 의미는 아주 명백하다. 세상은 그 수족관처럼 ‘가짜 집과 수초’로 이루어진 허위의 세계이자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주홍빛 금붕어’처럼 끊임없이 헤엄치며 어딘가로 향하려고 노력하는, 거지같고 구질구질하며 지긋지긋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연민의 감정은 그동안 주인공을 괴롭혀온 자괴감이나 수치심을 밀언내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절망의 그림자가 아닌 ‘형형한 빛’으로 미화된다. 그러나 개인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낭만주의적 변론을 통해 그처럼 유보 없이 자기정당화에 동조하는 일은 미학적으로도 껄끄럽고 현실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자아가 아니라 세계가 문제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 세계라는 장애물만 제거된다면 자아는 자동적으로 행복해질 거라는 이념의 모든 특징들을 압축한 그 환한 상징에는 엄청난 이기주의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김혜나의 상징은 소설 속에서 진실이 굉장한 중요성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모든 진실은 자아에 헌신하는 충직한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특정한 문학적 신념을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히 자기반성의 소산이 아닌 자기기만의 결과인데, 이 사르트르적인 자기기만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은 실제로 『제리』의 심리학적인 목적과 기능으로 보인다.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새롭고 특별한 인생을 바라는 현대적인 영혼의 갈망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파괴에 대한 사실적인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작가의 이야기는 개연성 있는 것이 된다. 이때 주인공의 생활은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목격하게 되는 이기적이고 방종한 종류의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그녀는 교육과 노력을 통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의 입문을 수행하는 대신 인생은 단지 운명적 조건의 문제일 뿐이라는 구실로 부모와 교사의 간섭을 피하고 성적 방종이라는 협착한 세계에서 일탈적 자유만을 구가한다. 또 기억이라고는 오직 ‘술과 섹스’밖에 없으면서도 매번 변함없는 일상에 염증을 느낀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는 그런 젊은이이기도 하다.

 

강이 지갑을 뒤적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야, 5000원만 줘 봐. 강의 목소리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자기 여자 친구가 아니고, 또 오늘은 자기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니까 좀 보태라는 식이었다. 번번이 찾아오는 쓰레기 같은 새끼한테 그동안 군말 없이 대 준 게 누군데. 네가, 이러고도 나를 또 찾아오면 너는 정말 개새끼야! 라고 말하며 돌아서 버릴까 싶기도 했다.

(······중략······)

침대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누우려는데 별안간 그가 지난번 시도하다 만 애널 섹스를 하자고 난리를 부렸다. 2주쯤 전이었나. 그는 자꾸만 항문에 삽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도 죽도록 하고 싶다고 말이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콘돔을 끼고 들어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그러나 콘돔을 덧씌운 그의 성기가 항문에 닿자마자 나는 소리를 꽥 지르며 침대에서 굴렀다. 그것은 이전까지 느껴오던 고통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군가 내 살들을 죽죽 찢어발기는 듯했고, 그 사이로 온몸의 내장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그에게 무릎 꿇고 빌면서 제발 그만해 달라고 부탁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런데도 그는 괜찮을 거라며, 오늘은 아마 잘 들어갈 거라며 성기에 콘돔을 끼우고 있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원해서 온 건데, 생각하니 머리가 핑 돌았다.

 

강이라는 ‘인조이 파트너’에게 ‘애널 섹스’를 요구받고 주인공이 난감해 하는 대목이다. 그녀는 그 ‘쓰레기 같은 새끼’와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찾아오는 그에게 섹스를 허락해 왔을 뿐만 아니라, ‘2주’ 전에는 변태적인 섹스에 대한 그의 요구로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서도 ‘오늘은’ 자청해 그를 불러내었다. 그런가 하면 ‘귀가 거의 벌집 수준’이 될 만큼 피어싱을 한 그녀는 그곳을 뚫을 때마다 온갖 부작용과 고통에 시달리며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서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또 귀를 뚫는다. 드디어 그 고통이 배가 되는 코까지 뚫기에 이르는데, 불행하게도 그녀는 늘 같은 경험을 하지만 언제나 같은 결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루이 파스퇴르의 유명한 금언에 나오는 우연과 마찬가지로, 경험은 마음에 준비된 것만을 지지하는지도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선택이 계속되는 한, 주인공이 ‘사회적 편견과 비난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리』의 작가는 단지 그러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표면적인 객관성 속에는,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이기적 욕망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현실들에 직면하는 일에 대한 은밀한 거부가 담겨 있다. 즉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자포자기와 성적 방종을 뿌리로 하고 있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편견’과 ‘차별’, 그리고 ‘소외’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개념적 필터들 통해 걸러버리는데, 특히 주인공이 사용하는 ‘편견’이나 ‘차별’이라는 단어의 변용된 내포는 오래된 외연을 압도하면서 그녀의 이기주의에 대한 용이한 변명이 된다. 작가에 따르면, 놀랍게도 차별은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별하는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성적, 인종적, 계급적 편견에 수반되는 불쾌한 언행이다. 그렇다면 김혜나는 평등이라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어 정당한 편견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셈인데, 이것은 “에이스들은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환영받는 세상이지”라는 제리의 극도로 서투른 견해에 대한 주인공의 공감과 동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실의 얼굴 상처 말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제리의 불알을 빨았다. 내 대답 따위는 개의치 않고 제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거, 사실은 부모의 학대 때문이 아니래.”

나는 다시 제리의 귀두로 올라가 단단해진 그의 성기를 서서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실은 나이지리아의 어느 부족 태생이래.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성인식 때 불에 달군 칼로 아이의 얼굴을 지진다는 거야.”

입술을 한껏 오므리고 내려가는 도중 한 번씩 혀를 내밀어 핥으면서 귀두가 목젖까지 닿도록 깊숙이 다가갔다. 제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걸 미국 사람들이 오해해서 그렇게 퍼졌다는 말도 있고. 아, 누나.”

제리의 성기가 목젖 너머로 밀려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식도 안쪽까지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옅은 신음을 흘리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도대체 실의 상처에 대한 말은 무엇이 진실일까. 이 많은 이야기들 중에 과연 진실이 있기나 한 걸까. 정말이지 그의 얼굴에는 어째서 그렇게 커다란 상처가 나 버린 걸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명확하지 않았다. 항상 문제만 있고 해답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상처뿐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의 배경이 되어 있는 편견과 차별의 사회적 굴레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세상의 불평등한 관계로부터 오는 등장인물들의 ‘상처’에 주목함으로써 드러낸다. 영국의 흑인 가수 실의 얼굴에 난 상처가 ‘성인식’이라는 사회적 관습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제리의 새로운 증언을 의심하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문제’가 세상으로부터 오는 상처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상처가 보편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김혜나의 소설에서 그것의 기능은 자괴감과 수치심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기능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에게 ‘상처 받은 삶’이라는 명제를 통해 그녀 자신을 재도전을 앞둔 실패자라기보다는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그것은 충동과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으로부터 오는 비참함에 대한 모든 개인적 책임을 면제받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상처 받은 자아의 연약한 면모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사려 깊은 고대적 충고 대신 ‘너 자신이 되라’는 경솔한 현대적 격려와 결합함으로써 결국 이기심에 봉사하는 힘의 원천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실제로 김혜나의 소설은 경험의 보다 깊은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로 인해 상처 입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제리』는 자신이 불행해진 진정한 원인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잘못은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에 있으며, 따라서 행복은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는 일뿐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있는 소설이 분명하다. 더 나쁜 것은 작가의 방종한 자기표현이 자신의 소설에 그려진 성적 방종을 훌쩍 넘어간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온갖 선정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방탕한 경험을 풀어놓는 일만으로도 파괴적이고 반도덕적인 내용에서만 미학적 성취를 발견하는 문학적 무대에서 주목을 끌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제리』는 개인적인 불행을 일반화된 진리로 바꾸어서 작가가 자기 경험의 불편함을 회피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고, 또 훈련되지 않은 노력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표현이 충격적이기만 하다면 문학적으로 성공적인 데뷔가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을 그녀에게 심어준다고 할 수 있다.

 

킨제이(미국인의 성생활에 관한 충격적인 통계를 통해 성적 터부를 깨는 데 일조한 보고서의 저자이다) 식 자기 홍보의 걸작은 그렇게 탄생한 것인데, 자기존중의 표현으로서의 그 걸작이 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무런 장점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녀의 표현이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이 없다거나 오늘날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인 젊은이들의 영혼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작가는 단순하고 무지한 자아라고 할지라도 자기표현에서 장애물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데, 가령 매춘부를 생각나게 하는 옷을 입고 다니는 주인공의 후배 미주가 ‘시인이라는 꿈’에 대해 말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그 꿈은 한마디로 자기만족을 통해 구원받으려는 현대적인 영혼의 사회심리적인 문제들을 압축한다. 그러니 작가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속일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로부터 예외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치명적인 사회적 결과들을 예고하는 위험한 씨앗들을 품은 두 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일상적 자아를 긍정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이자 행복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요점을 벗어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등장인물과 작가 자신을 혼동하고 있고, 따라서 김사과와 김혜나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저속성과 이기주의는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곤경에 빠진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그저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곤경을 표현한 소설이 그 곤경을 비판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이러니라는 문학적 장치 때문에)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아니 양의적인 모호성으로 도피하는 기교마저도 지나치게 높은 수준인지, 두 젊은 작가는 자신들의 소설을 사회적 곤경의 징후이기는커녕 너무도 명백하게 그러한 곤경을 자극하는 원인으로 만든다. 아니면 그 소설들은 적어도 그 곤경의 일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가끔이 아니라 종종 예술을 모방한다. 물론 그 젊은 작가들은 자유를 억압한다며 사회적 굴레를 깨뜨리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자유라는 것은 기껏 저속하고 이기적인 언행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비록 더없이 미숙하고 야만적이라고 해도, 유일무이한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그런 사회를 건설하려는 소망조차 피력하는데, 여기서 건설을 위한 파괴는 결국 파괴를 위한 건설에 귀착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혁명적 급진성에서 미학적 성취를 찾는 몇몇 작가들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문학은 그 의미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유, 그것도 절대적 자유를 확보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자유의 가치가 무엇이고 또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조악한 관념만으로 만족하며, 이런 재앙적인 자기만족 상태에서 수많은 일상적 자아와 본능을 제한 없이 풀어놓는 오류에 이끌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진정 개탄해야 할 문제는 사회적 곤경이 아니라 그 곤경을 젓가락처럼 닮아 있는 문학의 곤경이 아닌가 한다.

 

어둠을 몰아내려는 시도가 더 큰 어둠을 낳는 경우가 있다. 어떤 문학이 창조적인 파괴를 보여주는지, 아니면 파괴적인 창조를 드러낼 뿐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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