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곤경

마음의 생태학적 도착

택선고집 2010. 10. 19. 18:28

마음의 생태학적 도착

 

 

오양진

 

 

2009년 1월 어느 날,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한 용산의 한 지역 철거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인이 분명치 않은 화재 발생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그 참담한 사건을 대하면서, 나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모두의 생존을 위해 생태학적 참사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던 한 사회가 철거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거칠게 묵살한 끝에 용산 참사를 맞이하고 만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빈곤이라는 보다 가깝고 절실한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사회에서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생태학적 문제들을 고민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것은 분명히 짧은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부정할 수 있는 생각도 아니었다.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일은 그 사건에 대한 젊은 문인들의 반응이었는데, 이것이 ‘사람의 말’이라며 그들은 ‘절대적 자유’에 대한 꿈을 선언하고 있었다. 법의 폭력적인 집행에 대한 의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선언으로 다가왔다. 물론 자유에 대한 꿈은 예술가들의 해묵은 이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한계를 모르는 자유의 절대성을 내용으로 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특정한 한계로부터의 자유를 말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한계들로부터의 자유를 말했던 것인데, 말하자면 자유의 이름으로 특정한 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법 그 자체를 반대한다고 할 수 있었다. ‘세상의 공인받지 않은 입법자들’이라는 시인에 대한 셸리의 자부심 넘치는 정의가 역설적이지만 나에겐 위안이 되어주었다.

 

불행하게도 셸리의 위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젊은 문인들의 선언은 그 이후로 사람들 사이에서 거부감 없이 용인되었던 것이다. 물론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에 대한 그러한 비전은 우리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심지어 모든 일에서 신중하고 비판적이길 바라는 지식인들조차 그것을 논란거리로 삼지 않은 것은 그 문인들의 선언을 확증해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반응이 없다는 것이 곧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불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묵인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것은 적어도 절대적 자유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상상적 공감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자유가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오늘날 금지와 끊임없이 타협하는 일이 자유의 본질이라는 칸트적 아이디어는 우리의 지식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유독 난해한 교훈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의 적은 금지나 법이 아니라 획일성과 유행이다. 한마디로 자기억제의 실패인데, 당연히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은 금지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수해야 할 것과 혁신해야 할 것을 알기 위해 그것을 반성한다. 그러나 금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관념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 특히 그들의 전형이 되는 문학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자체의 이점들 때문에 아편처럼 유행하고 있다. 실제로 습관적으로 법을 깨고 경계를 부수는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불온함이라는 찬사와 함께 일종의 반문화적인 명예를 얻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물론 그렇게 될 때의 사회적 결과는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또 다른 이점도 생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진공 속에서 움직이는 도덕적 모나드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직접 보자.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부분

 

이 시는 지금 이곳에서 예술적으로 세련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금지나 경계에 무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장 도착자만큼 금지를 금지하라는 조악한 요구를 극적으로 구현하는 예는 달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자신의 남성 안에서 ‘여성’을 발견한 그 복장 도착자는 심지어 자신에게는 ‘자궁’이 있다는 병리학적인 환상을 통해 생물학적인 경계마저도 뛰어넘는다. 그러나 진정 도착적인 것은 황병승이라는 시인의 생각과 마음에서 발견되는데, 놀랍게도 그는 프로이트라면 문제의 증상이라고 보았을 것을 그 문제의 해결책을 삼는다. 그러니까 만일 복장 도착자의 비밀스런 욕망과 행위를 은폐할 필요성이 제거된 사회가 도래한다면, ‘여장남자 시코쿠’가 겪었다고 주장하는 부당한 차별에서 암시된 비관용적인 사회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에서 일어난 도착은 위반과 전복의 평범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한국문학에서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내가 요점을 벗어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시인이 복장도착자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준 것은,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내아이들에게’ 비밀스런 욕망을 품었던 일 이외에 딱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무서운 시선’과 ‘골방의 악취’를 견뎌야 했던 비관용적인 사회의 악덕을 강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르쿠제가 ‘과잉 억압’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문명은 항상 자신의 불만을 가지게 마련이고, 따라서 관용은 언제나 관대한 이해를 바라는 사람들 편에서의 어떤 과묵함을 수반하지 않았던가? 말할 것도 없이 수치심의 외투인 과묵함을 벗어던질 때 생각과 마음의 손상은 치명적인 광기가 되는데, 복장도착자의 손에 ‘쥐어진 칼’이 그것을 예고한다.

 

지난밤 우리는 나쁜 마음 못생긴 얼굴로 엑스를 했지

파아악 냄새를 풍겼어 아줌마 아저씨들 인사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아침부터 오를 죽이고 더럽게 아름다워졌어 아름다워지기 시작했지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결국 모두 한 이웃이라고 아줌마 아저씨들 입을 모았지만

우리는 오를 살해하고 구체적으로 타지(他地) 사람이 되어갔어

이 노래에서 저 노래로

결국 같은 종점이라지만 우리는 처음 지나는 노선을 몇 번이고 돌며

나쁜 마음 못생긴 얼굴로 가슴속에 맺힌 노래를 불렀지

파아악 물탱크처럼 차올랐어 땅거미가 질 때까지

이 옥상에서 저 옥상으로 결국 하나의 숲이었지만

우리는 잠자리를 옮겨 다니며 조금씩 젖어들었지 굿 나잇, 버릇없는 인사를 던지며

아줌마 아저씨들 쓰러진 오를 안고 결국 하나의 무서운 법칙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지만,

더럽게 시끄러웠고 우리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 계단에서 저 계단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엑스엑스에 도전했지

파아악 한꺼번에 미끄러졌지

 

—황병승, 「세븐틴」 전문

 

황병승이라는 시인의 또 다른 시인데, 여기서는 아예 추함과 아름다움, 좋은 태도와 나쁜 태도, 심지어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경계조차 무시된다. 결국 시인에게 금지나 경계를 넘는 일은 시의 역할이 아니라 시의 유일한 역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어쨌든 참으로 노골적인 이 작품의 의도는 명백하다. 즉 사회가 좀 더 관용적이고 자유로운 곳이 되기 위해선 ‘오’가 사라짐으로써 ‘엑스’가 차별받지 않는 민주적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큐브릭 식 망상을 제기하려는 것인데, 17세 악동들이 복장도착자의 후견인으로 나선 또 다른 도착이 나타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억압적인 ‘오’의 살해라는 명분 속에서 ‘가슴속에 맺힌’ 채 연민과 경쟁하던 분노 표출의 정당성을 찾는 일이 암시하듯이, 보다 심각한 것은 ‘버릇없는’ 알렉스들로 분장한 시인은 정상적이고 사회적인 사람들과의 평등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노래’한다는 점이다. 싱잉 인 더 레인.

 

차이에 대한 존중과 야만주의 사이의 연결점은 너무도 명백해서, 민주적 감정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고안하는 일이 절실하게 느껴질 정도다. 만약 엄살 같아 보인다면, 시인의 또 다른 시 「살인마(殺人魔)-Birthday Rabbit」을 읽어보라. 물론 오늘날 한국문학의 공식적인 관리자들은 온갖 불만에 대한 감각을 문학적 예술의 진정한 본성으로 간주하고 있느니만큼,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날것의 격분에다 미학적 알리바이를 부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상징적 살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술적으로 정당화된 살의는 곧 현실적으로도 정당화될 것인데, 왜냐하면 제약 받는 것보다 제약 없이 행동하는 것이 좀 더 쉽고 좀 더 즉각적인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차별을 차이로 대체하는 다문화주의적 오류에 빠진 비평적 엘리트들 사이에서 황병승이라는 시인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가 얻고 있는 지속적인 인기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기는 그의 두 번째 시집도 얻고 있다.

 

스위트 워러, 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툭 하면 시를 쓴다 멋진 시들을

줄 줄 줄 써버린다

 

문친킨 문친킨,

스위트 워러의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말을 자주 중얼거린다

(······)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일 때

뒤죽박죽으로 출렁거릴 때

담배를 뻑뻑 피우며

문친킨 문친킨······ 하고 말이다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든

그저 문친킨 문친킨일 뿐이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한 백 번쯤 중얼거렸고

역시 문친킨의 힘이란

멍청해진 존재를

삽시간에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황병승, 「문친킨-미치mich를 생각하며」 부분

 

지금까지 5쇄를 거듭했다는 황병승의 두 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고른 작품이다. 그렇게 된 것은 이 시가 시인의 이전 시편들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약간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것은 자신에 대한 비평적 엘리트들의 얼빠진 옹호에 생색이라도 내려는 듯 범죄적인 것으로부터 미학적인 것으로의 초점 이동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관심의 대상을 살인에서 언어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시에서도 무차별적인 자유의 행사를 가로막는 경계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진 주제가 된다. 이번에는 그것이 ‘무슨 뜻이든’ 상관없게 만드는 ‘문친킨의 힘’으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파괴하는 일인데,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왜 그토록 인간의 불만들을 없애게 될 원리들을 열망했는지 그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그는 시를 쓸 때마다 겪는 고통을 손쉽게 장악하고 ‘줄 줄 줄’ 쓰면서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예술적 갈망을 가진 시인에게 허용되는 비평적 관용의 사례가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개인적 문제들과 사회적 문제로부터 오는 강박관념들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멍청해진’ 상태에서의 ‘담화의 무한 폭발’은 곧바로 ‘숭고’로서 호명되는 영예를 얻는다. 물론 시적 서술에서 명확성은 숭고성을 감소시키고 모호성은 숭고성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그 호명은 맞다. 하지만 평가는 틀린 것인데, 사실 황병승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이 멈춘 그 ‘숭고한 뒤죽박죽’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자각을 통해 초월적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한계에 대한 겸허한 분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이라는 그 어두운 무한으로부터 오는 무익한 환상으로 인해 말문이 막히게 된다. 분별의 경계를 넘으면, 현명해지기보다 바보처럼 되는 것이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숙제도 너에게 세련을 알게 해주지는 못해 차라리 학교에 가서 세련되게 매를 맞아라 그것이 낡아빠진 작문 숙제일 경우에는 더더욱, 이라고 말하는 삼촌의 모습은 너무나도 세련된 것이어서 오늘은 조금도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세련을 말하는 삼촌이 말이다 이것이 세련의 핵심쯤 되는가 보다

 

(······)

 

그러나 아빠의 생각은 다르다 언제나 우리와 다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말한다 네가 내 새끼라니······ 인생은 그런 게 아니지 인생은 그런 게 아니라니 하루 종일 뚝딱거리며 매일 똑같은 소리를 지껄인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라고 개집 하나를 지으면서도 아빠는 무엇 때문에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닮아가는 것일까

 

(······)

 

우리는 차라리 학교라는 게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열일곱인데 그것을 표현하기라도 하면 또 등짝으로 파리채가 떨어진다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를 일깨워주기는커녕 늙은 노처녀 선생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니까 말이다 국가적인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인생관이 너무나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

 

(······)

 

나는 늙은 노처녀처럼 국가적인 시체처럼 헉헉거리며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나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우리에겐 언제나 우리들만의 승리, 어쨌든 그런 것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굳게 믿으니까 말이다.

 

—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 부분

 

교육은 ‘바보 같은 짓’이 되고 교육에 대한 거부는 ‘세련의 핵심’이 되는 도착적이고 무분별한 세계가 찬양되고 있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숭고를 도착과 무분별로 연결하는 포스트모던적 숭고가 컬트화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별을 다만 ‘다르다’라는 차이로 대체하면 아주 커다란 심리학적 이점이 생기는데, 바로 과거와 의무의 무게로부터 해방되어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심각한 것은 문제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험에 대한 희망의 ‘승리’는 곧바로 좀 더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특성을 띠면서 교육과 지성, 나아가 문화의 향기를 지니는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반감과 심지어 총체적 거부라는 사회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이끌게 된다. 이런 가요를 기억하는가?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교육이 거부된 세계를 ‘이데아’라 불렀지만, 이제 황병승과 평론가들은 그것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좋은 것이다, 서서히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는 일”(황병승,「배우는 울고 마차는 굴러간다」에서). 정말 나쁜 것이 좋은 것일까? 아무리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몇 사람쯤은 진실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들은 그래도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숭고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경험에 문을 연다면, 그 전망의 상실이 창조적인 미래를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급한 아이러니로는 충분할 수 없는데, 무엇을 창조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미래를 개방하는 창조성은 부정성의 헛된 유희를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무엇보다 현대적 허무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은 까닭인데, 이것은 젊은이의 진영에 속하려는 모호한 욕망을 가지고서 자신의 민주적 감정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신원이기도 하다. 결국 존재하는 것과 타협할 때와 그것에 저항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성숙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인들 가운데는 사드는 칸트적 숭고의 진리라는 지젝의 히스테리컬한 가르침이 대중에게는 여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에 지적 자긍심을 가지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를 지식인 사회에 국한하고 사태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정신 생태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식인 사회에 유포되어 있는 도착된 생각과 손상된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재앙을 넘어서는 문화적 재앙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지적 엘리트들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이념들이 언제나 좋은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명백한 암시이기도 한데, 실제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적 유심론의 풍조는 이것의 효과적인 유인에 거의 저항할 수 없었던 대중들에게 성공적으로 감염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테의 천국보다는 보슈의 지옥이 언제나 더 강렬하고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명성에 대한 이기적 갈망 없이 참된 진실을 숭상하는 지식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힘이 나고, 그래서 오늘도 쓰레기를 치운다.

 

산야나 강가에서 쓰레기를 줍고 치우는 것이 자연을 지키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문학적 쓰레기들을 비평하고 치우는 것 또한 자연을 보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의 생태학이라는 사고 속에서는 마음이라는 자연을 보전하는 일은 자연을 지키는 생태학적인 사업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은 이전에도 그런 일을 멈추지 않고 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쓰레기 더미 안에서 문학의 소중한 가치를 간직한 생각과 마음의 보석들을 발견하는 일과 관계된 일이었다. 그러나 문학작품이 점차 쓰레기 속의 보석이 되기보다는 그 쓰레기의 일부가 되어가고, 또 몇 안 되는 보석들마저 그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리는 오늘의 상황은 비평적 작업에 새로운 의무의 추가를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요즘 비평가들에게는 문학적 보석을 발견하는 일보다 그 보석들이 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문학적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슈타이너는 이것을 비평과 구분해 서평이라고 불렀다)이 급선무가 되어야 한다.

‘문학 청춘’에 문학의 ‘가을’을 얹게 되어 유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되는 진정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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